영화 안시성을 보고
추석 연휴 동안 영화 '안시성'을 보았습니다.
역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거나 예전 KBS 대하사극류를 보신 분이라면 대략 안시성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당나라의 거센 공격을 홀로 막아낸 고구려 성주 양만춘 장군과 백성들의 눈물겨운 항전.
사실, 양만춘 장군이라면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이 분을 가장 먼저 기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06년 경 KBS 대하사극 '대조영'에서 양만춘 장군으로 분한 배우 임동진씨가 최근 가장 많이 알려졌겠고요.
비슷한 기간대에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신동훈씨가 양만춘 장군 역으로 열연을 펼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사실 양만춘 장군 하면... 1992년인가요 당시 KBS 대하사극 '삼국기'에서 양만춘 장군 역할의 배우 임혁씨가 가장 인상에 깊다 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양만춘 = 임혁의 이미지가 강했으니까요. (그 때 제 나이 7-8살이지만 사극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양만춘 장군의 이미지.. 혹은 드라마 속 사극에서 장군의 이미지는 주로 저렇게 선이 굵고 중년 이상의 연륜을 가진 배우들이 연기했었기 때문에, 영화 시작 후 첫 양만춘 장군의 등장에서는 낯선 기분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역사가 스포지만, 지금부터는 영화 안시성의 감상과 동시에 꽤 많은 스포 혹은 스포성의 내용을 적을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 보실 분은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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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후 2013년 '찌라시 : 위험한 소문'을 끝으로 한동안 꽤 오래 쉬고 계시다가 이번에 '안시성'으로 다시 흥행가도를 달리고 계시네요.
데뷔작에서 당시 대배우(였지만 심하게 하락세였던) 박중훈의 만만찮은 연기내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배우 정유미가 좋은 배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요, 그 바탕에는 연출과 각본이 모두 탄탄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찌라시 : ~는 안봤어요. 볼 생각도 없었고... 사실 그런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제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영화 장르와 스토리였습니다. (재밌게 보신 분들께는 송구스럽습니다).
이번에는 부담이 꽤 크셨나봅니다.
영화 '안시성'은 몇 가지 측면에서 기존 성공을 담보했던 확실한 레시피를 끌고 와서 상당히 예측 가능하게 맛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맛있는 중국요리나 김치찌개를 먹고 난 뒤, 약간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는.. 흔히 누군가는 MSG 중독 증후군이라고도 말하는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영화 '안시성'은 우리가 예측 가능한 모든 스토리의 전개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급박했던 당시 전황은 몇 줄의 친절한 자막으로 정리가 되었고, 곧바로 당나라의 침입과 화끈한 전투신이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고구려의 내분 (연 - 양 간)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요즘 대중음악이 1분의 미리듣기를 감안하여 '싸비'부터 바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즘 디지털 동영상의 맨 앞이 가장 절정 장면을 따로 잘라서 보여주는 것처럼 "자 우리 제대로 한번 보여주고 시작할거니깐 따라오세요"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안시성의 모습과 성주 양만춘의 소탈하고 인간적이고 리더십 있는 모습이 나오고요. 당나라가 쳐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위험한 순간 극적으로 구원 받고, 대놓고 사망플래그를 보여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말고, 안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정말 안죽는.. 그리고 희생할 것 같은 사람은 희생하는 그런 예측 가능성에 단 1%도 어긋남 없는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설마 했는데 진짜더라고요. 정말 배우 캐스팅까지 그럴 줄은..
영화 안시성의 전체 스토리는 그간 우리가 늘 보아왔던 실제 여러 역사, 혹은 그것을 극적으로 재구성항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다를 수 없죠.
전쟁은 늘 공격과 수비로 나눠질 수 밖에 없고, 마지막에는 결국 공성전을 통해 그 승부를 가늠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공성전은 성문을 부수거나, 성벽을 타넘거나, 성 안의 수비가 알아서 항복하지 않는 한 결코 끝나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을 공격하는 모습이나 장비들도 크게 다를 건 없겠죠.
그래서 안시성에는 여러 익숙한 장면들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근접전은 영화 300처럼 무차별 슬로비디오를 곁들인 카메라 웤으로 선홍빛이 아닌 약간 빛깔을 누른 검붉은 혈기가 낭자하는 액션을 선보입니다. 배우들의 메이크업과 조명도 컨트라스트가 꽤 짙은 느낌이고요.
공성전은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킹덤오브헤븐의 느낌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었고요. 발석차를 포함한 여러 신무기들이 등장하는 장면이나 특히 당나라 황제의 호위대가 마치 영화 300 속 아랍인들처럼 가면을 쓰고 나오는 장면은 실소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서사는 그래서 반지의 제왕이나 영화 300과 같은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미시적으로는 영화 300처럼 결사대의 결사적 항전 모습이, 거시적으로는 마지막에 간달프가 구원군을 데리고 온 것 처럼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온다는 설정도 유사합니다. 그냥 이미 잘 만들어진 이런 서사 구조에 역사적 인물과 사건만 잘 끼얹은 느낌이에요. 마치 미쓰비시 파제로에 현대에서 조립해서 갤로퍼로 내놓는 느낌이랄까.
영화 '안시성'은 나중에 가서 정말 진심어린 탄복을 하게 되는 포인트가 있는데요, 배우 조인성이 지난 번 영화 더킹에 이어 이번 영화까지 하드캐리로 끌고 나갈 만한 능력을 이제는 확실하게 갖췄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정말 조인성씨는 많은 고생을 했음이 드러나고, 심지어 영화 말미에 가서는 영화 속에서도 리더십과 능력을 ㅏ갖춘 멋진 장수로 성장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짐이 느껴집니다. (물론 영화 초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상한 개그 욕심이 영화 몰입을 방해하는 게 문제입니다만)
그의 옆을 함께 지켜주는 심복들 (배우 배성우, 박병은, 오대환 등)은 끝까지 함께 양만춘 장군을 도와 안시성을 지켜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죠.
네, 사실 그리고 나머지 배우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한동안 여러 커뮤니티에서 큰 논란이 된 가수 설현 (배우 김설현)은 예상했던대로 두 가지 포인트의 문제가 있는데요, 개인의 연기력 부재는 확실한데,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연기력 부재가 더 티가 나고 마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억지로 러브라인을 껴넣은 듯한 느낌이랄까요. 사실 없었어도 큰 무리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좋은 배우 엄태구의 캐릭터가 소비되는 것도 너무 아쉽고요. 그 외에도 더 입체적인 매력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 정은채나, 특히 당 태종 이세민 역할을 맡은 배우 박성웅은 본인이 지닌 매력의 5%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정말 중국어 듣기평가 교재 같은 느낌 외에는요.
당나라 황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부여된 캐릭터 자체의 입체적 특징이 전혀 존재하지 않다 보니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분노하고 맞으면 아파하는 1차원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급급하고, 심지어 그것을 중국어로 하다 보니.... 전혀 대륙의 황제가 갖는 두려움이나 신비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아 너무 아쉽습니다.
분명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고주몽의 활 설화나,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갈등을 극대화 한 설정, 그리고 사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스토리를 전개해 가는 것은 꽤 흥미로운 시도였다고 봅니다. 영화라면 이런 것은 당연히 인정해 줄 수 있는 장치라고 보고요. 다만 나중에 가서는 사실 안시성을 지켜내는 이야기 외에 이런 이야기들은 결론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드라마적 기폭제로 소비되었다는 것은 꽤 아쉽습니다. 덕분에 연개소문도, 신녀도, 무엇보다도 사물이라는 주인공도 너무 캐릭터가 평면화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도대체 사물은 왜 그렇게 관객에게 불친절하게 양빠가 되어버리고 만 것일까요.
영화 '안시성'의 액션씬은 분명히 한국 영화의 높아진 액션 수준을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초반 CG처리가 좀 어색한 부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정말 잘 찍었더라고요. 그 외 전체적인 미장센이든 시퀀스든 카메라 워킹이든 다 그럭저럭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나라군대가 쳐들어 오는 그 순간의 공포랄까, 정말 절망 속에 있는 고구려 민초들의 두려움의 민낯 같은 건 거의 표현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위풍당당 고구려 민족이라 그런걸까요? 20만 대군 앞에서도 5천 고구려 군사들과 민초들은 사실 별로 무서워하지도, 극한의 공포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당나라 군대와 병사들도 그렇게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최종병기 활'의 초반 청나라 군이 조선의 국경을 넘어오는 장면을 보면서 엄청난 공포심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속 청나라 군의 침략과 공격 장면도 그렇고요. 그건 정말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진짜 공포와 두려움의 느낌이었는데요. '안시성' 속의 같은 장면들은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치 '평양성'이나 '천군'같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안시성'은 현재 300만 관객을 돌파하고 대략 손익분기점인 560~580만 관객 돌파를 향해 빠르게 질주 중에 있습니다. 아마 감독님께서 투자자와 제작사의 여러 요구와 요청을 다 받아내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사실 더 흥행을 강하게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다만,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 특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그렇게 맞짱 뜨는 애국자 포지션을 꾀하던 그런 메이저 영화사의 영화들이 쉽고 편한길만 가려는 것처럼 보여서 꽤 걱정이긴 합니다.
물론, 요 몇년 동안 영화가 우리 언론과 정치권이 하지 못한 여러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많이 내주었던 건 사실이죠. 그 공은 충분히 격려 받고 인정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이런 정도의 완성도와 '당연함'을 가진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놓고 1,000만 돌파니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지킨다니 이런 이야기는 좀 민망한 점이 없지 않아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영화, 곧 잊혀질 것 같아서 그냥 부득부득 리뷰 한번 남겨봅니다.
** 저는 영화를 깊게 논평할 줄 모르는 일반 관객 중 한 명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봅니다. 그 점을 양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