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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Feb 27. 2023

#5. 네가 쌓여서 내가 된단다.

[나]_조수경

 그림책 [나]는 기존의 그림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편집되어 있다. 마치 두 권의 책을 맞붙여 둔 것처럼 하나는 아이의 시선에서 하나는 어른의 시선에서 쓰고 그려진 그림책이다. 책의 표지에는 긴 끈을 서로 맞잡은 아이와 어른이 있고 첫 장은 까만 하늘 우주 별 어딘 가에 둥둥 떠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림으로 시작된다. 나는 아이가 바라본 시선을 먼저 펼쳐보게 되었다. 아이의 팔에는 뒤엉켜진 끈이 손목에 매어져 있다. 너무 바쁘고 해야 할 일들도 많은 시끌벅적하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학교에서 엄마가 남긴 ‘손 씻고 숙제하고 있어라’ 메모만 덩그러니 놓인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서 깜빡 졸다가 아저씨를 만난다.     


“난 너의 미래다. 

네가 쌓여서 내가 된단다.”     

‘나의 미래를 꿈에서 볼 수 있다면...’ 


한 번쯤은 상상해 보던 일이다. 그림책 속 과거와 미래는 바닷속을 지나 사막의 오아시스로 나와 아름답게 물든 노을을 지나 우주의 한 편에서 반짝이는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아저씨는 반짝이는 푸른 별을 하나 가리켰어.

“저 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란다. 여기서 보니 작아 보이지?”

내가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 아빠, 친구들...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였구나.     


 나의 미래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나의 인생에서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숫자 사십. 내 인생계획은 삼십 대에 머물러 있었다. 대학졸업, 대학원졸업, 취업, 결혼, 임신, 출산까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뒤에 계획이 없었다. 출산을 하고 3개월의 출산휴가 뒤에 바로 현장으로 복귀하는 기존의 나와 새로 생긴 나의 역할 모두를 감당하며 복귀하는 워킹맘들도 있지만 출산과 동시에 육아에만 올인하며 살아온 내 6년의 시간이 지나니 곧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100세 시대인 요즘 마흔에 일을 다시 시작해도 경력 10-20년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니 그래야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최근 들어서야 내 인생 후반전 계획을 고민하게 되었다. 엄마와 아내만의 삶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느낄 때도 있지만 자의적인 경력단절기간을 중단하고 집이 아닌 밖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오롯이 내 이름으로 나의 존재로 살아내고 싶은 마음과 아이들에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요즘이다.      

 이번에는 어른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야기이다. 피곤한 날들의 연속, 수많은 가면들 속에 가면을 쓴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간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갔지만 그들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가면을 벗는다.    

 


“내 진짜 얼굴이 어떤 모습이었지?”

도무지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어. 

얼굴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지.      


 ‘어른스러워 보인다.’, ‘성숙하다.’ ‘맏이 같다.’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지만 나는 그 말이 좋은 의미로 들리지 않았었다. 무엇이든 그 나이 때에 어울리는 모습이라야 그때에 맞는 충족함을 누리고 살아가는 거라는 생각을 했기에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런 말들은 섣불리 철이 들었다는 뉘앙스로 느껴져 내 안에도 있는 아이다움을, 어리광스러움을, 발랄함을 눌러두고 어른스러움의 가면을, 성숙함의 가면을, 맏이로서의 가면을 쓰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겉 사람과 안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달라 나의 진짜 모습이 뭔지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림책 속에서 아이와 어른은 바다에서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마주한다.  

    


“이 바다 기억나요?”

“글쎄, 내가 여기 왔었던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때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 있어요.

그래서 눈이 아닌 마음으로 봐야 할 때도 있죠.”     


 내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있던 생각과 마음 중에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이다. 이 문구를 한동안 SNS 프로필 문구로 오래 사용했었는데 그림책 속에 담겨있어 반가웠다. 어른은 소년의 물장난에 어릴 적 친구들과 놀았던 모습을 생각하며 물에 비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추운 날씨가 계속되던 겨울 어느 날 차디찬 아이의 발이 슬와(무릎 뒤쪽 접히는 부분) 사이로 파고드는 순간 내가 자주 하던 습관이 떠올랐다. 유난히 손발이 찬 나는 엄마의 슬와에 발끝을 파고들며 한참을 있다가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빼앗아 슬며시 발을 빼곤 했던 그 순간과 마주했다.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라 움찔할 정도의 온도인데도 언제나 무릎 뒤 그 사이를 내어주며 꼭 품어주던 엄마의 따스함을 내 딸아이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아이의 발이 잠시 나를 따뜻한 엄마 품에 데려갔다 온 기분이었다. 이렇게 종종 아이는 나의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며 나를 과거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현재로 데려왔다. 

 한 번은 친정에 갔다가 새벽형 딸들의 이른 기상에 다른 가족들과 이웃들마저 깨울까 싶어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히고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의 일터로 데리고 나간 적이 있다. 마냥 신이 나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친정엄마와 마주 앉아 보고 있자니 나의 십 대, 이십 대 때 한껏 꾸미고 친구들을 만나고, 데이트를 하던 내가 그 중심가를 지나고 있는 잔상이 보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 오롯한 나에서 엄마역할의 가면을 쓰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자니 웃음이 피식 났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 담겨 남아있는 그 시간, 감정, 감각들... 내가 지나온 이 모든 것은 켜이 켜이 쌓여 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남아있는 ‘나’이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았을 때 온기가 남아 있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순간순간들에 나의 과거가 되어줄 너와  너의 미래가 될 내가 보다 아름다운 기억들로 채워갈 수 있길 지금, 이 찰나의 시간 조각들 속에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삶이 되길 바라본다.    


 “이제 더 이상 가면은 쓰지 않을 거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어.

나는 알고 있어. 소년이 언제든 다시 와 줄 거라는 걸. 

나는 한때 소년이었고 그 소년은 언제나 내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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