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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22. 2019

부르주아 혁명가?

Max Weber-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경제와 사회

 마르크스의 사유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면서도 도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두 개념으로 대표되는 유물론일 것이다. ‘경제적, 물질적 토대가 종교, 사회, 문화, 국가, 법, 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해석은 마르크스를 왜곡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통념이 완벽한 오독은 아니다. 분명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들 곳곳에서 경제적 생산력과 생산양식이 상부구조의 형성에 끼치는 중대한 영향을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토대의 형성과 축적이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는 바로 이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마르크스를 거꾸로 뒤집고자 한다. 즉 베버는 상부구조가 토대로부터 일정 정도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을 넘어 상부구조가 혁신적으로 새로운 토대를 산출해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일차적으로 그 이전 시대 동안에 이루어진 자본 축적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이었다.” 베버는 자본주의(근대 서구 특유의 형태로서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경제적, 물질적 토대의 발전이 아니라-물론 그러한 토대의 기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토대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고, 그것이 모든 국민들에게 지배적인 헤게모니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과 헤게모니화 역시 단순히 자본주의적 물적 토대만으로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자본주의 정신은 “통상적으로 평화로운 방식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와 대립되는 다른 이데올로기들과의 투쟁 속에서 점차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본주의 정신이란 무엇일까? 베버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한 돈 욕심이 아니다. 돈 욕심,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윤을 남겨 돈을 벌려는 욕구와 이를 체화한 사람들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다. 자본주의 정신과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가지는 중요한 차이는 바로 이 돈 욕심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관한 관점의 차이이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들의 경우 이런 돈 욕심에 대해 비도덕적이거나 심지어는 반도덕적이라며 비난을 퍼부었으며, 돈 욕심과 그로 인한 성과들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한 뒤에도 단지 그것을 마지못해 용인했을 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힘은 고대와 중세 전체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헤게모니였는데, 심지어 돈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될 위험성을 늘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속죄받기 위해 “교회에 막대한 헌금을 바침으로써 교회와 화해하고자” 했다.


 반면 자본주의 정신은 합법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방식으로 돈 욕심을 충족시킨다면 그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한 영리 활동을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자 소명으로 여기고, 이러한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의무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 정신은 돈 욕심이 “‘윤리’라는 형태로 구체화된 모종의 규범을 지닌 생활양식” 다시 말해 하나의 에토스로서 존재하고,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주의가 움트기 시작한 근대 초창기 시민들에게 규범적인 에토스로 기능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전통주의”로 불리는 기존에 존재하던 에토스,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사는 데 필요한 만큼의 돈만을 벌려고” 하는 태도와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 그 자체를 하나의 목적이자 의무, 즉 ‘소명’으로 삼는 태도는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사람들의 도덕적인 정서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강력한 저항들 속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근대의 헤게모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 정신의 도움 덕분이었다.


 “종교를 토대로 한 윤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종교적 신앙이 살아있는 한에서는 그 윤리로부터 생겨난 행위들에 대해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이 아닌 심리학적 보상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이 살아있는 한, 이러한 심리학적 보상은 … 독자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경제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종교의 이러한 영향은 프로테스탄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금욕적인 근면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그리고 부의 무제한적 축적에 대해 “‘구원의 확실성’을 확증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심리적인 보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는 “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토대로 그들에게 실천적인 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이런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바탕으로 생겨나고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정신과 그로부터 꽃을 피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 것인가?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지배의 세 유형을 분석하면서 바로 그런 세상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한다.


 베버에게 지배란 “일정한 (또는 모든) 명령에 대하여 어느 특정한 인간 집단이 복종할 수 있는 가망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는 단순히 강압이나 경제적 이해관심으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배가 온전하게 성립되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피지배자들이 일정 정도 복종의 의사를 가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고 길러내고자”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 지배의 정당성의 종류에 따라 세 가지 종류의 이념형적 형태의 지배들을 제시한다.


 첫째는 법·합리적 지배이다. 이러한 지배는 “제정된 질서의 합법성에 대한 믿음과, 이러한 질서에 의해 지배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지시 권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지배의 제도적 형태는 관료제이며, 관료제적 지배를 특징짓는 것은 비인격성과 몰개성이다. 다시 말해 법·합리적 지배 속에서 인간은 규칙과 형식주의와 대중 행정의 요구로 인해 평균화된 개인으로 취급되며, 이렇게 평등해진 개인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만 고려될 뿐이다.


 둘째는 전통적 지배이다. 이러한 지배는 “예전부터 타당했던 전통의 신성함에 대한 일상적 믿음과, 이러한 전통에 의해 권위를 지니게 된 사람들의 정당성에 대한 일상적 믿음에 근거한다.” 이런 전통적 지배는 불가피하게 신분제적 형태로 운영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자본주의적 경제를 발전시키는 법률적 권리와 형식적 합리성을 깨뜨리고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는 전근대적인 형태의 지배이다.


 셋째는 카리스마적 지배이다. 이러한 지배는 “어느 개인의 신성함이나 영웅적인 힘 또는 모범성에 대한 일상 외적 헌신과, 이러한 개인에 의해 계시되거나 창조된 질서에 근거한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앞서 두 종류의 지배가 일상을 조직하는 지배의 형태인 데 반해, 언제나 두 지배의 일상성에 균열을 내는 비일상성의 형태로 등장하는 지배이다. 따라서 카리스마적 지배는 “규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비합리적이고”, “과거를 붕괴시키며, 이러한 의미에서 특별히 혁명적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지배는 일시적인 비일상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일상화로의 전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통적 지배나 법·합리적 지배로 전환된다.


 베버는 이 중에서 법·합리적 지배와 그 제도적 형태로서의 관료제가 “가장 합리적인 형식의 지배 행사”이며, 사회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든, 사회주의적으로 조직되든, 근대적인 국민국가와 시민의 대중적 일상생활을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료제의 합리화의 법칙 속으로 필연적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관료제의 형성·유지·발전에 자본주의가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행정을 만들어내었고, 온갖 합리적인 사회주의는 그러한 행정을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으며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베버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주요 행위자인 자본주의적 기업가만이 이런 관료제적인 지배로부터 “(적어도 상대적으로)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심급”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모든 다른 사람은 대중 단체 속에서 관료제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 빠져 들어가고 말며, 이것은 마치 대량 재화 제조 속에서 즉물적인 정밀 기계의 지배에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다.” 결국 베버에게 있어서 부르주아 계급은 그 자신이 자본주의와 관료제, 나아가 법·합리적 합리화의 지배를 만들어내는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합리화에 파열음을 내고 혁명적 계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혁명가인 것이다.


 베버의 주장은 현대에 들어 가장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들의 사례들 속에서 그 타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FANG(Facebook, Amazon, Netflix, Google)으로 대표되는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들은 그 자신이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가장 진보적이라고(또는 공산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기본소득제도의 도입과 부유세율의 대폭적인 인상을 진지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이용자들의 빅데이터들을 이용해 엄청난 수익을 올림과 동시에 그 수익의 일부들을 지구 곳곳의 빈자들과 환자들을 위한 지원에 사용한다. 근대적 국민국가도, 세계적 국가연합체도, 지역적 자조단체들도 전 지구적 위험에 재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들 성공한 부르주아들은 마치 혁명가처럼 전 지구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에게 부르주아 혁명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주고 이들의 구원을 기다리며 칭송하면 되는 것일까? 저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결코 혁명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본소득제도의 도입과 부유세율 인상을 주장하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급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상품을 살 구매력조차 사라지게 될 형편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지구 곳곳의 빈자들과 환자들을 도움과 동시에 그들의 수많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수익상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부르주아 혁명가가 아닌 단지 부르주아이다. 그들이 보이는 혁명적인 행동들은 오로지 그들만이 혜택을 받는 자본주의의 전원이 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베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적인 기업가는 자본주의의 관료제적인 법·합리적 지배가 더 강력한 합리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진화할 만큼만 혁명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제외하면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또는 계급은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들을 역사 이래 수없이 제시할 수 있다.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과 선장의 지시를 거부하는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에서부터 5월 광주와 톨게이트 위의 노동자들까지. 수많은 사례들이 웅변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대한 진정한 저항은 프롤레타리아들만이, 다시 말해 그 라틴어 어원인 proletarii의 뜻처럼 단지 자식을 낳는 존재로만 여겨지고 국가와 사회에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 자들, 그래서 국가와 사회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셈해지지 않는 자들만이 가능하며, 나아가 오로지 이들 프롤레타리아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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