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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Oct 08. 2019

불화(不和)하는 생활세계들

Jürgen Habermas-의사소통행위이론 2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세상에 낸 1981년은 적어도 서유럽의 좌파적 지식인들에게는 위기의 시기였다. 그것은 단지 혁명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멈춰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서유럽에서는 혁명의 시도들이 실패했을지언정 풍부한 좌파적 이론과 실천들이 계속해서 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카치가 그러한 것처럼 왜 혁명이 실패했는가에 대한 탐구가 있었을지언정 혁명 자체의 가능성조차 포기해야 할 상황에 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1981년, 혁명의 모든 가능성은 봉쇄된 듯이 보였다.


 첫째, 누구보다 앞장서서 공산주의 혁명을 선도할 계급적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금과 풍요로운 문화생활 속에서 계급의식은커녕 자본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수준의 적대감조차 형성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좌파적 지식인들은 계속해서 주장해왔지만, 도대체가 그러한 허위의식을 해체하고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어떤 계기도 프롤레타리아들에게서 찾아질 수 없었던 것이다. 좌파는 자신의 기획을 실천할 주체를 상실해버렸다.


 둘째, 사회민주주의의 주류화는 갈수록 좌파를 이론적 빈곤상태로 내몰았다. 혁명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제도 정치에 뛰어들어 점진적 개선으로 사회주의를 이룩하자는 사회민주주의는 서유럽의 수많은 좌파적 지식인들(그리고 노동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꼭 그만큼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몽상적인 헛소리로 치부되어갔다. 


 셋째, 68혁명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신좌파의 등장은 기존의 좌파를 구좌파, 즉 낡고, 고리타분하고, 철지난 계급투쟁론이나 되풀이하는 좌파로 밀어냈다. 기존의 좌파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틀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페미니즘,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과 같은 신사회운동들은 새롭고, 세련되고, 쿨한 매력으로 청년들을 사로잡으며 좌파의 주류로 성장했다.


 이런 좌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새로운 변혁의 모델을 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모델은 더 이상 기존의 좌파가 사회를 설명하던 도구들, 예컨대 역사적 유물론,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항대립, 경제적 계급투쟁론과 같은 도구들에 기반할 수는 없었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그런 사유들은 변화한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우선 사회의 구조를 새로운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바로 의사소통행위와 생활세계의 개념들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한 주체가 세계 내의 어떤 것과 맺을 수 있는 행위자-세계 관계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것은 각각 “하나가 동일한 객관세계 안에 존재하거나 혹은 그 안에서 산출될 수 있는 어떤 것에, 집합체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사회세계에서 당위로 인정되는 어떤 것에, 혹은 다른 행위자들이 화자에게 고유한, 즉 화자만이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관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어떤 것에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자-세계의 세 가지 관계들은 의사소통적 발언들 속에서 다시 등장한다. 즉 의사소통적 발언은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 각각에 대한 발언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세계의 기준체계는 화자와 청자가 의사소통할 때 행위상황에 대한 공통의 정의를 형성하기 위해 의지하는 해석의 틀로 사용된다. “의사소통적 발언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당면한 상호이해의 필요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서로 중첩되어야 하는 상황정의들이다.” 즉 두 의사소통 당사자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둘이 처해 있는 의사소통행위가 발생하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공통의 정의가 형성되지 않으면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화자와 청자는 상황의 내용들을 행위자-세계의 세 가지 관계들에 알맞게 배정함으로써 공통의 상황정의를 이루어낸다. 그 이후에야 의사소통 참여자들은 상황의 내용들이 속한 관계에 알맞은 의사소통적 발언을 수행함으로써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상황은 고정되고 확고한 경계를 가진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상황은 주제를 통하여 부각되고, 행위목표와 계획을 통하여 분명해지는 생활세계적 지시연관들의 한 단면”이다. 즉 상황은 생활세계라는 보다 거대한 배경에서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주제와 계획을 통해 분리시킨 것이다. 따라서 참여자들이 주제와 계획을 변경하거나 또는 참여자 외의 요인들이 주제와 계획을 변경시키게 될 때, 상황은 그 경계가 변형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상황은 언제든지 월경(越境)될 수 있는 경계를 갖는다.”


 이처럼 상황에 대해 더 큰 배경인 생활세계란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속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생활세계는 “현재의 장면에 대해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즉 의사소통 참여자들에게 생활세계는 자명하고 일상적인 사실들의 총체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생활세계는 그 자체로는 참여자들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오로지 생활세계의 특정 사실들이 참여자들에 의해 문제시되어 상황의 구성요소가 되었을 때, 생활세계의 일부는 그 확실성과 자명성을 잃고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이런 생활세계에 대한 직관적인 사례로 우리는 문화와 언어를 통해 전승되는 배경지식을 생각할 수 있다. 문화와 언어는 두 의사소통 참가자들이 존재하고 의사소통을 시작하고 상황을 정의하는 데 배경이 되지만 특정 상황에서 그 자체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 배경지식에 대해, 그것도 그 전체가 아닌 그 일부에 대해 새롭게 문제제기하는 상황이 창출될 때에만 그 확실성을 잃는다. (문화와 언어에 의한 배경지식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하버마스에 따르면 수행적 모순이다. 왜냐하면 문화와 언어 전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 문제제기 자체는 그것이 의사소통적 발언이 되기 위해서 문화와 언어에 의한 배경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자들이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빠지곤 하는 수행적 모순과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의사소통 행위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생활세계의 지평 내에서 움직인다. 그들은 이것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 생활세계는 말하자면 화자와 청자가 만나는 초월론적 장소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그들의 발언이 세계와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와) 부합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이런 타당성 주장을 비판하고 확증하며, 의견 불일치를 표출하고 동의를 이룰 수 있는 장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사소통적 일상실천에 휘말려 있는 행위자의 소박한 태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생활세계의 제약성을 꿰뚫어볼 수 없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생활세계의 개념은 단지 “문화적 확실성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활세계는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의 제도적 질서와 인성구조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우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매체가 생활세계와 관련해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미드를 따라 언어를 이용한 의사소통은 상호이해를 통한 전통과 문화적 지식의 갱신과 재생산, 행위조정을 통한 사회통합과 연대의 산출, 그리고 개인적 정체성의 형성을 통한 사회화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그리고 사회화의 과정에 각각 문화, 사회, 인격이라는 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가 대응된다.” 요컨대 생활세계는 문화, 사회, 인성의 상징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적 일상실천은 이런 상징적 구조들을 재생산함으로써 생활세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다. 덧붙여,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적 유물론과 결별하는데, 그는 상징적 구조들의 복합체로서 생활세계의 재생산 과정은 “생활세계의 물질적 기초를 보존하는 문제”와 구분되어 생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물질적 토대의 재생산과 상징적 구조로서 생활세계의 재생산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의 문화, 사회, 인성, 그리고 생활세계의 재생산 기제로서 의사소통의 기능인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사회화는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가 이처럼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재생산되면서 발달하는 것을 생활세계가 구조적으로 분화되어 발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생활세계의 구조적 요소들과 그것들의 유지에 기여하는 과정들이 분화될수록, 상호작용의 제연관은 더욱 더 합리적 동기에 따르는 상호이해의 조건 아래, 그러니까 종국에는 더 나은 논거의 권위에 의지하는 합의형성의 조건 아래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의사소통적 실천으로 인해 생활세계가 문화, 사회, 인성으로 분화되고 또 각각의 구조들이 재생산되면서 더욱 복잡한 구조들로 분화될수록, 문화, 사회, 인성의 내용들은 참여자들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합리성에 기반하는 것들만이 보편적 합의에 의해 권위를 얻게 됨으로써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토의는-규범적 맥락들로부터 상당 부분 벗어나서 합리적 동기에 따른 ‘예/아니오’의 입장 표명으로 전환된-상호이해의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는 이상화된 생활세계를 가리킨다. 그러한 자율화는 더 이상 물질적 재생산의 압박이, 합리적으로 투시(透視)될 수 없는 규범적 기본 동의의 가면 뒤에, 그러니까 신성한 것의 권위 뒤에 자신을 숨기고 있지 않은 한에서만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는 의사소통적 실천 속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을까?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 의사소통행위의 개념이 가지는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설명한다. “목적의 실현(혹은 행위계획의 실행)이라는 목적론적 측면과 상황의 해석 및 동의의 성취라는 의사소통적 측면이 그것이다.” 의사소통행위에 내재하는 이 두 가지 측면 중 목적론적 측면은 체계라는 생활세계의 물질적 토대의 재생산을 위한 방향으로, 의사소통적 측면은 상징적 구조의 복합체로서 생활세계의 재생산을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따라서 생활세계의 재생산에 있어서 합리성의 척도는 모든 참여자들이 참여해서 의사소통할 때, 의사소통행위에 내재한 의사소통적 측면, 다시 말해 강제 없는 상호이해와 보편적 합의추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따라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사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의사소통행위에는 두 가지 합리성, 즉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있다. 목적 합리성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위한 기제로서 작동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이다. 이를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사회화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는 사회의 상징적 구조체계들인 문화, 사회, 인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 이를 생활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회란 이 체계와 생활세계 양자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하버마스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통합된 집단의 행위연관이 체계로서 안정화된 상태”이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행위자들 사이의 불화(不和)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생활세계의 재생산, 나아가 사회의 재생산이 불화 없이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게 불화들은 언제나 “그것들의 고유한 이름 아래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하버마스의 사유가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만 긍정될 수 있도록 만든다.


 하버마스에게 불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만 긍정될 수 있다. 첫째, 불화는 오로지 한 생활세계의 내부에서만 발생하게 된다. 이는 하버마스가 불화에 대해 ‘장애’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장애란 어쨌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존재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여기서 장애학에서 논의되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에 관한 비판은 참고할 만하다. 장애에 대한 사회적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주체 내부에 있는 어떤 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어떤 특성을 장애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범주화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범주화를 제거하더라도, 그 주체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손상과 손상의 경험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하버마스로 돌아와서, 생활세계의 재생산의 장애에 미치는 여러 생활세계 외적인 영향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와 장애의 경험은 생활세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참여자들이 생활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면, 즉 생활세계의 외부가, 적어도 참여자들의 인식 속에서라도-존재할 수 없다면, 불화는 생활세계 내부에서만 발생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즉 불화는 장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화는 언제나 생활세계 전체를 의문시하는 방식으로는 발생할 수 없으며, 생활세계의 특정한 지시연관들을 상황 속으로 편입시켜 문제시하는 방식으로만 발생할 수 있다. 


 둘째, 불화는 오로지 생활세계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으로만 긍정된다. 다시 말해 불화는 합의에 의해 그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목표로 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의사소통적 실천은 먼저 두 가지 위험을 피해야 한다. “빗나간 상호이해, 즉 의견 불일치와 오해의 위험, 그리고 빗나간 행위계획, 즉 실패의 위험이 그것이다.” 여기서 의견 불일치, 오해, 실패로 명명되는 모든 것들은 곧 불화를 의미한다. 즉 서로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화가 발생할 때 두 주체는 공동의 상황정의와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토의하고 합의한다. 그 과정 속에서 생활세계는 새로운 상황을 자기 안으로 편입시키면서 재생산한다. 따라서 생활세계의 재생산 기제로 포함될 수 없는 불화, 오로지 불화 그 자체로 남고자 하는 불화는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등장할 수 없고 은폐되거나 억압된다. 


 셋째, 불화는 오로지 합리성을 가지고서만 ‘문제’로서 사회에서 가시화될 수 있다. 생활세계가 분화되고 그에 따라 불화가 발생할 때, 이 불화는 언제나 “고유한 이름”을 가져야 한다. 불화가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생활세계로부터 가져와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때 “고유한 이름”은 합리성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합리화된 생활세계에서 정당한 문제제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즉 합리성을 가진 불화만이 생활세계의 장애로 파악되고 진정한 문제로 참여자들에게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못한 불화들은 언제나 “토의를 통한 검토를 견뎌내지 못하는 신념들에 의해 은폐”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의무를 지고 있다. 요컨대 역설적이게도 불화를 적절히 가시화하기 위해 필요한 이름이 그 자체로 불화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세 가지 측면들은 그러나 사실 한 현상의 세 가지 단면들인데, 그것은 바로 근대화되고 문명화된 합리적 사회라는 생활세계와 나머지 생활세계들 사이의 불평등이다. 몇 가지 사례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독일인 하버마스와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동아프리카의 주민이 속하는 생활세계는 동일할까? 미국인과 ISIS 테러리스트의 생활세계는 동일할까? 최상층의 다이아몬드수저라 불리는 자들과 컨베이어 벨트 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했던 김용균의 생활세계는 동일할까? 물론 하버마스는 『테러시대의 철학』에서 테러리즘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한결같이 그러한 생활세계‘들’ 차이로 보이는 것, 그리고 그런 차이들이 만들어내는 불화로 보이는 것은 의사소통의 왜곡에 의해 발생한 병리적 현상이며, 참여자들이 ‘상호적 관점 취하기 mutual perspective taking'를 통해 공통의 생활세계를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활세계‘들’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한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생활세계는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거의 전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개인에게 다른 생활세계의 존재는 이해-불가능한 존재이고, 그런 생활세계 속에서 사회화된 타자는 합의-불가능한 존재이다. 이 두 존재 사이에 발생하는 불화는 생활세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도, 생활세계의 재생산을 위해서 발생하는 것도, 합리성을 가지고 한 생활세계가 다른 생활세계로 진입하는 것도 아니다. 그 불화의 현장은, 한 생활세계의 전체와 다른 생활세계의 전체가 충돌하는 곳이고, 두 생활세계 간의 권력관계에서 투쟁이 발생하는 곳이며, 일체의 합리성이 작동을 멈추는 곳이다.


 이런 불화에 대해 의사소통의 왜곡에 따른 병리라 부르는 것은 낙관적인 자유주의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생활세계에 속한 개인이 그 자신의 생활세계를 포기하는 것은 그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기적적으로 어떤 삶의 방식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정했다고 그와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온 자들이 순순히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건 순진한 기대다. 그것은 단지 합리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전향의 문제이다.


 결국 하버마스의 사유는 그가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한 보편적 합의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한 생활세계를 보편자로 위치 짓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그 생활세계는 그가 말한 대로 국가의 경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곳은 언제나 일정 정도의 자본(이때 자본은 단순히 재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 등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재생산되면서 하나의 권력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일체를 자본이라 칭하는 것이다)을 가진 자들, 따라서 어느 정도 분별력 있고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자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생활세계이다. 요컨대 하버마스의 염원과 달리 그의 사유는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결합한 20세기 중후반 서유럽이라는 특정한 장소(topos)에 아주 강하게 붙잡혀있다.


 이 한 생활세계와 그 세계의 참여자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위치 짓는 순간, 그 행위는 다른 모든 생활세계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불평등한 위계로 밀어 넣게 된다. 그리고 이 불평등에서 발생하는 생활세계들 간의 불화들은 단지 하나의 병리, 장애, 또는 소음으로만 치부된다. 합리와 비합리, 언어와 소음의 구분은 그 자체로 권력적이다. 하버마스가 보여준 것은 새로운 좌파적 기획의 단초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적 기획이 노출했던 한계점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장소-없는(atopos) 보편적 기획을, 헤겔적 표현으로는 절대정신을 이론적으로라도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보편자임을 주장하는 기획에 맞서 각자의 장소(topos)들을 가진 존재들의 평등한 존재론을 통해 불화의 순간들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어쩌면 바로 이 평등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불화의 순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보편적 절대정신이 실현되는 순간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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