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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Nov 08. 2019

메시아 되기: 평등의 감각을 회복하기

Michel Foucault - 감시와 처벌 

 권력은 대개 일종의 사물과 같은 것으로, 따라서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있는 것으로 표상되곤 한다. 왕이라는 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근대 이후에 권력의 소유자가 인격적 군주가 아니라 집단적인 존재(예컨대 부르주아 계급)일지라도 여전히 유사한 형태로 표상되었다. 요컨대 지금까지 권력에 대한 표상은 푸코에 따르면 “군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권력에 대한 이러한 군주제적 표상은 언제나 권력의 중심을 탐색하려는 시도를 낳는다. 그러한 시도는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는 누구인지, 지배자(들)는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었는지, 그 지배자(들)로부터 가장 하층의 피지배자들까지 퍼져나가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이로부터 어떻게 권력의 중심에서 주변부에 가해지는 폭력과 위계를 해체하고 중심을 재구성할 것인지를 사유했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에 대한 이러한 군주제적 표상에 반대해 “왕 없이 권력을 사유”하고자 했다. 푸코는 권력을 하나의 유일한 중심이 “모든 것을 결코 무너지지 않을 통일성 아래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지점에 대한 다른 한 지점의 모든 관계”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푸코는 “권력의 합리성을 주재하는 참모본부를 찾으려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권력은 왜 푸코가 제안한 바대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근대의 핵심적인 두 가치인 모두의 자유와 평등이 적어도 법기술적(法記述的)으로는 부정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법적으로 모두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는 순간, 권력을 갖는 중심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중심은 해체되어 권력이 모두의 손에 쥐어져야 한다는 것이 근대가, 그리고 근대의 법이 천명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을 군주제적 표상으로 사유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권력과 권력관계 그리고 권력작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력은 여전히 명확한 논리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존재하면서 다양한 권력작용들을 통해 권력관계들을 산출한다. 단지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푸코는 바로 규율권력을 왕과 참모본부가 없는 근대 이후 새로운 형태의 권력으로 규정한다.


 푸코에 따르면 규율권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존에 권력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여겨졌던 사취나 강제 징수가 아닌 인간을 훈육시키는 것이다. 즉 규율권력의 관심은 개인이, 그 개인의 내용이 무엇이든, 단순히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 그 자체를 “제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규율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 굴복하게 만드는 대신 분리하고 분석하고 구분하며, 그 분해 방법은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개체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추진된다. 그것은 유동적이고 혼란하며 무익한 수많은 신체와 다량의 힘을 개별적 요소의 집합체로 만들게끔 ‘훈육을 시킨다.’” 이러한 규율권력은 과도하게 자신의 권력을 뽐내는 의기양양한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획적인, 그러면서도 영구적인 관리 방식에 의거하여 기능하는 조심스럽고 의심 많은 권력”이다. 따라서 규율권력이 사용하는 수단은 장엄한 의식이나 거대한 기구가 아닌 단순하고도 사소한 것으로, “위계질서적인 감시의 시선, 규범화된 상벌제도, 그리고 이들을 이러한 권력에 특유한 방식인 평가를 통하여 결합시키는 방식 등”이다. 이러한 수단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위계질서적 감시는 “시선의 작용에 의한 강제성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술에 의해 권력의 효과가 생기는 방식이며, 또한 반대로 강제권의 수단에 의해 적용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이러한 위계질서적 감시는 최초에는 군대의 야영지의 구조 배치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과시하기 위한 것도, 외부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것도 아닌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세부에 미치는 내적인 통제를 위한, 그리하여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시적인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건축의 문제가 가장 먼저 제기되었다. 즉 “개인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조작자의 역할을 할 건축”의 필요성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건축은 수용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품행을 개선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권력의 효과를 심층적으로 행사하고, 그들을 잘 알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결국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할 때 이러한 건축은 단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그로부터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원의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규율의 시선은 일정 지점마다 중계지점(감독관, 감시인, 사무원, 조교 등)을 갖는 피라미드형이 더 적합하다. 피라미드형은 두 측면에서 원형보다 장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1. 피라미드형을 통해서 규율권력은 통제할 모든 영역을 감시할 수 있다. 원형의 감시체제는 한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지만 통제가 필요한 영역이 증가할수록 그 중심에 부과되는 업무량이 폭증하게 된다. 반면 피라미드형은 중계지점들이 그 업무를 분담함으로써 규율권력은 통제할 모든 영역으로 그 피라미드를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2. 피라미드형은 “규율의 행위에 대해 타성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또한 그 행위에 대해 구속이나 장애가 되지 않도록 신중히 하고 가능한 한 최선의 효과를 증대시키는 기능이 되기 위해 규율의 시선은 규율의 장치와 빈틈없이 일치되도록 한다.” 하나의 중심이 모든 것을 관찰하는 원형의 감시 장치는 피지배자들이 항상 누군가로부터 강압적으로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당한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행동을 타율적으로 만들게 되어 항상 불복종과 저항의 가능성을 남겨놓게 된다. 그러나 피라미드형의 감시 장치에서 규율권력은 보다 미세한 형태로 침투하게 된다. 그 때 감시는 개인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교사가 학생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한 감시를 떠올려보라. 따라서 이는 피지배자들의 수용성과 자발성을 보다 높임으로써 완전한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 결과 규율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요컨대 위계질서적 감시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그래서 항상 관찰당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피라미드형 감시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감시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계질서적 감시는 군대의 야영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형자들의 모든 행동으로, 노동의 전 과정으로, 교육의 모든 현장 속으로 퍼져나갔으며, 그에 따라 이러한 감시를 위한 건축 역시 교도소, 공장, 학교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계질서적 감시 덕분에 규율 권력은 “다양하고, 자동적이고 익명적인 권력으로서 조직된다.” 즉 왕과 참모본부 없는 권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규율의 위계질서화된 감시를 통해 권력은, 하나의 물건으로 소유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소유물로 양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 장치처럼 작용한다. 또한 그 권력의 피라미드형의 조직이 ‘우두머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장치의 전체구조가 ‘권력’을 만들어 내고, 영속적이고 연속된 영역 안에서 개인을 분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규범화된 상벌제도는 “선과 악의 두 가지 상반되는 가치에 의거하여 행동과 성적을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이다. 즉 특정한 가치들에 기초한 상벌제도를 통해 인간들이 그러한 가치기준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다섯 가지 작업을 실행한다. “첫째, 개인의 행동, 성적, 품행을 비교의 영역이자 차등화의 공간인 동시에 준수해야 할 규칙의 원리이기도 한, 어떤 전체 체계와 관련시키는 일이다.” 이제 인간의 모든 것은 항상 특정한 어떤 체계를 참조함으로써만 성립되게 된다. “둘째, 개개인을 상호 비교하여, 전체의 규범에 따라 구별 짓는 일인데, 여기서 규칙은 최소한의 출발점으로서, 지켜야 할 평가수준으로서, 혹은 접근해 가야 할 최적 조건으로서 기능하도록 한다. 셋째, 개인의 능력, 수준, 성격을 양으로 측정하고, 가치로 등급을 매기는 일이다. 넷째, ‘가치를 평가하는’ 측정을 통해서 실현해야 할 어떤 획일적 제약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끝으로, 모든 차이점들에 관해서 차이의 정도를 규정하고, 비정상의 외적인 경계를 규정지을 한계를 설정하도록 한다.” 이 같은 상벌제도는 “규율기관의 모든 지점을 통과하고, 매순간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비교하고, 구분하고 서열화하고, 동질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규범화이다.”


 규범화된 상벌제도 속에서 권력은 이중의 효과를 얻는다. 한편으로 권력은 인간들을 각자의 특성에 따라 최대한도로 활용해 최선의 효과를 낳을 수 있도록 세밀하게 분류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인간들이 동일한 모델에 복종하도록 압박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규범화를 추진하는 권력은 동질성을 강제한다. 그러나 그 권력은 편차를 측정하고 수준을 정하며, 특성을 규정하고, 상이점을 서로 조정하여 유익한 것으로 만들게 하여 결국 개별화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평가는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범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의 기술을 결합한 것”이다. 평가에 대한 분석 속에서 우리는 “객체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예속화”와 “예속된 사람들의 객체화”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권력의 관계와 지식의 관계들이 중첩되는 현상은 평가를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다.”


 평가는 가시성에 관한 전통적인 관계를 역전시킨다. “전통적으로 권력이란 자기를 보이고, 자기를 과시하며, 스스로를 드러내고, 또한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휘되는 움직임에서 힘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권력은 자신을 잘 보이는 밝은 영역에 전시하고 피지배자들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규율 권력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행사된다. 오히려 권력은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의무적인 가시성의 원칙을 부과한다. 규율에서 모습을 보여야 할 대상은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빛 속에 드러냄으로써 그들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지배는 확보된다. 규율의 대상인 개인을 예속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보여지고, 언제라도 보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규율 권력은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본질적으로 대상들을 구획 정리하며, 스스로의 위력을 드러낸다.” 평가는 이러한 객체화가 그 정점에 달하는 의식이다. 요컨대 규율 권력은 모든 피지배자들을 양지로 끄집어내어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평가하고 분류한다. “이러한 결과로 규율의 대상인 개인에 관한 일련의 모든 기호체계가 형성되는 것이며, 이 기호체계는 개인들의 특징을 동질화하면서 또한 평가에 의해 확립된 개인들의 특징을 기록할 수 있게 만든다.” 나아가 이러한 관찰과 기록과 평가를 통해 권력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객체로서 지배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게 된다.


 평가는 근대 이후 새로운 권력 양태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술이다. “새로운 권력 양태에서 개개인은 자신의 개인성을 자신의 지위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특징짓고, 어떤 식으로건 자신을 하나의 ‘사례’로 만드는 특징이나 척도, 차이와 ‘평가’의 규약에 따라 묶여 있게 된다. 결국 평가는 개인을 권력의 결과와 대상으로, 지식의 결과와 대상으로 만드는 여러 방식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즉, 근대 이전에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호화롭게 나타나는 권력 대신에 권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교묘한 방식으로 객체화하는 권력이 들어선 것이다. 군주권의 호사스러운 표상들을 과시하기보다 오히려 권력이 적용되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 낸다.”


 종합하면, 위계질서적 감시, 규범화된 상벌제도, 그리고 평가라는 규율수단들을 통해 규율권력은 개인화를 상층의 전유물에서 모두의 것으로 바꿔냈다. 즉 “권력이 더 익명적이고 기능적으로 됨에 따라 권력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은 한층 더 분명히 개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긍정적인 함의를 갖지 않는다. 규율권력 하에서 개인화된 인간들은 권력의 객체와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모든 저항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자율적으로 복종하고,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권력에 의한 평가를 참조해서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규율권력은 배제, 처벌, 억압, 고립, 은폐 등의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런 효과를 거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규율권력은 불평등하고 서열화된 현실 자체를 생산하고, 개인들의 개인성을 생산하고, 지식과 진실과 여러 관계들의 관례들을 생산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권력은 부정적이고 보수적인 방식이 아닌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방식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아름다운 전체적 모습이 우리의 사회질서에 의해서 절단되고 억압되고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질서 속에서 힘과 신체에 관한 전술에 의거하여 세밀한 의도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규율권력은 물론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규율권력은 어떤 중심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규율권력을 체화한 메시아(?)의 등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행사가 뭉툭하고 투박한 형태에서 날카롭고 섬세한 형태로, 예외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에서 일상 속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푸코는 이를 나병-페스트-판옵티콘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나병은 규율권력이 최초로 작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병환자에 대한 대처는 규율권력이 조야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추방의 의식”이다. 나병환자로 낙인찍힌 자들은 모두 추방되어 특정한 공간 속에서만 살아가도록 갇히게 된다. “‘대감호’(Le Grand Renfermement) 사건”(“푸코의 <광기의 역사> 1부에 잘 설명된 내용으로서, 17세기에 ‘구빈원’이란 이름으로,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기인, 범죄자, 방랑인, 성병환자, 매춘부, 걸인 등 모든 반사회적 인물들을 대규모로 가두었음”)은 이런 추방의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나병환자는 배척, 추방-봉쇄의 현실에 묶여 있고, 개인적 구별이 별로 중시되지 않은 집단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나병에 있어서 권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단지 일체의 접촉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페스트가 발생한 도시는 규율권력이 세밀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한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하면 그 도시 전체는 폐쇄되어 모든 인구의 흐름이 봉쇄된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명부에 올라 생존자, 환자, 사망자로 구분되며 또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 재분류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류에 따라 지켜야 할 의무들의 목록들이 존재하며, 시민들의 모든 사소한 움직임들도 통제된다. 피라미드형의 위계질서를 가진 감시자들이 항상 거리에 상주하여 허가 없이 집 밖으로 나오거나 다른 시민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고 감시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단 하나의 사소한 사건도 남김없이 기록되어 일련의 보고서들로 작성된다. 이 모든 것들은 권력이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도록 하면서, “규율장치의 충실한 모델”을 구성한다.


 이러한 규율장치는 강압적으로 도입되지 않는다. 오히려 페스트라는 무질서와 혼란의 상황을 바로잡는 질서와 구원의 수단으로 동원된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질서이고, 질서는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 개인을 특징짓고, 개인에게 속해있는 일,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 등 개인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질서는 규칙적으로 분화되는 전지전능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권력의 효과로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할 자리와 신체, 질병과 죽음, 재산 등을 규정한다. 혼란의 상태인 페스트에 대항하여, 질서의 규율은 분석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규율권력은 하나의 꿈을 갖게 된다. 그것은 개인과 시·공간의 “엄격한 분할”, “권력의 모세관과도 같은 운용을 보장해 주는 완전한 위계질서 체계를 매개로 한, 인간 존재의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는 규정의 침투”, “개인에게 ‘실제의’ 이름, ‘실제의’ 지위, ‘실제의’ 몸, ‘실제의’ 질병 등을 그대로 갖게 하는 것”이다.


 나병과 페스트를 비교해보면, 추방과 규율의 차이가 보다 도드라진다. 페스트는 나병의 경우처럼 “사람들을 한쪽과 다른 쪽으로 구분하는 집단적이고 이원적인 분리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분리와 개인별 배분, 감시와 통제의 심층적 조직, 권력의 세분화를 초래한다.” 나병환자는 모든 개인을 분류하는 환자-정상인의 이분법적 범주쌍의 하나이다. 즉 환자냐 정상인이냐 만이 개인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는 “개인적인 차이들이 바로, 다양화하고, 상호관련적이고, 보다 세분화한 권력의 억압적인 효과를 이루는 그러한 섬세하고 전술적인 바둑판 모양의 분할 속에서 포착된다.” 요컨대 나병은 낙인찍고 분리하여 추방시키는 것이라면, 페스트는 세분화하고 분석하여 배치되는 것이다. 이 둘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르다. 나병에 대한 추방의 의식 속에는 “순수한 공동의 꿈”, 즉 어떤 불순물도 없이 순수한 정상인들로만 구성된 공동체의 꿈이 담겨있다. 반면 페스트에 대한 규율의 구조에는 섞여있음과 혼란 그 자체로부터 분할과 배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꿈이 담겨있다. 그리고 전자에 비해 후자는 보다 완벽한 권력의 지배를 가능케 한다. “위계질서, 감시, 시선, 기록이 구석구석까지 확산되고,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 개개인의 신체를 명백히 그 대상으로 한 권력의 운용 속에서 정지된 도시,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통치가 가능한 도시의 유토피아다.”


 서로 다르지만 모순되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고, 위험한 혼합을 해결”하기 위한 이 두 가지 방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서로 융화되어간다. 즉 “한편에서는, … 추방된 자들에게 개인별 규율의 전술을 부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규율 통제의 보편화된 체제로 누가 ‘나병환자’인지를 명시하고, 그에 대해서 추방의 이원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제 환자에 대해 추방과 규율이 동시에 작동한다. 소록도는 추방과 규율이 교차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규율권력이 온전하게 행사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완전하고, 도처에 있고, 또한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는, 그러한 감시 도구를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해 감시는 “사회전체를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얼굴 없는 시선”이 될 수 있다. 판옵티콘은 규율권력, 나아가 추방과 규율이 교차하는 권력의 온전한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건축물이다. 판옵티콘은 잘 알려진 것처럼 원형의 건물에서 죄수들을 오직 중앙탑을 향해서만 개방된 독방에 가두고,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중앙탑에 감시자를 두는 형태이다. 판옵티콘 속에서 수인(囚人)들은 서로끼리도, 감시자도 보지 못하지만, 감시자는 모든 수인들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인들은 항상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만 자신은 볼 수 없다. 즉 그들은 “정보의 대상이 되기는 해도, 정보 소통의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그 결과 “밀집한 군중들, 복잡한 교류의 장소, 혼합되는 개인들, 집단적 효과,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이 들어선다.” 이로 인해 군중은 계량과 통제가 가능한 다수로 대체되고, 수인은 고립되고 항상 관찰당하는 상태가 된다. 요컨대 판옵티콘은 “‘바라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본다는 것은 이중적 효과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상대를 보고 있으면 동시에 나는 상대로부터 보인다. 그러나 판옵티콘에서는 한 쪽은 항상 보이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항상 보기만 한다. 바로 이 ‘바라봄-보임’의 분리 자체가 권력의 결과이자 작용이자 효과이다.


 또한 판옵티콘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권력을 “자동적이고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든다. 판옵티콘 속에서 권력은 특정한 인격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어떤 계산된 분배 속에, 그리고 내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개개인 등이 묶여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그러한 기계 장치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판옵티콘에서 간수가 누구인지, 어떤 동기로 감시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간수가 없어도, 따라서 어떠한 동기가 없어도 권력은 여전히 작동한다. 푸코에 따르면 이는 민주주의적 요구에도 잘 들어맞는데, 어느 누구라도 권력의 집행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므로, 판옵티콘에 의한 규율권력의 강화는 독재자의 폭정이 아닌 민주적 통제가 일어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재판위원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판옵티콘의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효과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수감자의 정신 속에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 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상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이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시키도록 한다. 그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1인 2역을 하는 셈이다. 그는 스스로 예속화의 원칙이 된다.” 따라서 물리적인 감시가 중단되어도 수감자의 자발성에 의해 감시의 효과는 계속된다. 이는 권력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권력행사 없는 지배를 통해 권력은 물리적인 무게를 경감하고 심지어는 무형화된 것으로 된다. 요컨대 판옵티콘은 “수감된 자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도록 한다.” 


 나아가 판옵티콘은 항상 권력의 대상들을 관찰하고 감시한다는 점에서 지식의 생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들을 다양한 방식의 실험들에 노출시키고, 교육과 영양 등에 관한 다양한 조작을 가함으로써 권력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판옵티콘은 “일종의 권력 실험실로 운용된다.”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 “지식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이와 같이 확장된 지식은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표면에서 인지할 수 있는 대상들의 정체를 알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규율권력은 자신의 힘을 왕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개인화되는 신체 속에서”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와 판옵티콘 시설은 중요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는 “하나의 예외적 상황으로서 비정상적인 악성 유행병에 대처하기 위해 권력이 발동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기능형태를 상정하지만, 결국은 퇴치하려는 병이나 마찬가지로 삶-죽음의 단순한 이원론으로 귀착된다.”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는 페스트가 퇴치되면 더 이상 그 규율권력은 유지될 수 없고 정당성을 상실한다. 페스트에 있어서 규율권력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일종의 비상대권(非常大權)이다. 반면 판옵티콘은 그 자체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작동가능한, 즉 그 기능을 일반화할 수 있는 모델이다. 이는 판옵티콘이 가지는 여러 장점 때문이다. 판옵티콘은 권력의 대상은 무한히 늘리면서도 권력의 집행자는 0으로 수렴시킬 수 있다. 또 판옵티콘은 수시로 개입과 통제가 가능해 실패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 나아가 판옵티콘은 어떠한 신체에 대한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판옵티콘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이 권력행사의 대상들로 하여금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다른 강압적 권력들보다 더 큰 효율성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페스트의 경우 규율권력은 나병의 경우와 같이 여전히 강압적인 강제와 금지의 성격을 가지고 행사된다. 그러나 판옵티콘에서 규율권력은 “권력에 의해서 가동되는 여러 기능에 대해 엄격한 구속이나 부담스런 짐처럼 느껴지는 외부로부터의 권력행사가 아니라, 권력이 그러한 기능들 속에 극히 교묘하게 스며들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그 기능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다. 판옵티콘은 “어떤 기능 속에서 권력의 관계들을 작용시키고, 또한 권력관계들에 의해서 어떤 기능을 작용시키는 방법”이다. 따라서 보건, 교육, 산업생산, 징벌 등 언제 어디에서나 “어떤 임무나 행위를 부과해야 할 많은 개인들을 상대하게 될 때, 이러한 판옵티콘의 도식은 이용가능성이 높은 하나의 전형이다.” 푸코는 이에 대해 “한층 더 교묘하게 ‘물리적’으로 될수록 표면적으로는 한층 덜 ‘신체적’으로 되는 그러한 권력”이라고 일갈한다.


 결국 규율은 특정한 제도도, 특정한 기구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한 형태이고 일체의 도구, 기술, 방식, 적용범위, 목표를 갖고 있는 권력행사의 한 양식이다.” 다시 말해, “규율이란 집단 다수의 유용한 규모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다수를 적절히 유용하게 만들어 놓기 위한 것으로서 다수를 지배해야 하는 권력의 장애요소들을 감소시키는 세밀한 기술적 창조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런 규율이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을 넘어 집단의 다수를 통제할 필요가 있을 때 언제든지 반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페스트라는 특정한 예외상황 속에서만 등장할 수 있었던 규율권력은 이제 판옵티콘과 함께 그 예외와 정상의 경계를 넘어서고 그 경계를 흐리면서, 예외상태의 정상화, 또는 예외상태의 일반화를 만들어낸다. “예외적인 것, 특권적인 장소, 상황에 따른 특별한 조치, 혹은 특이한 모델이었던 것이 이제는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를 통해 판옵티콘은 페스트처럼 삶과 죽음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량들을 강화시키는 일”까지 수행한다. “생산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공중도덕의 수준을 높이는 등 말하자면 성장과 번영을 이룩하려는” 모든 길 위에 판옵티콘이 건설되는 것이다. 이제 규율은 “권력의 경제를 지배해 왔던 ‘폭력적 징수’라는 낡은 원칙”을 “‘부드러움-생산성-이익’의 원칙”으로 대체하며, 이 원칙에 따라 생산적 효율성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킨다. 이러한 규율의 성과는 규율이 더 이상 예전처럼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효용을 증가시키는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지금까지 논의된 개별적인 규율방식들의 대부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 근대적 산물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새로운 것은 “그 방식들이 조립되고 일반화하면서 지식의 형성과 권력의 증대가 하나의 순환적인 과정에 의해서 규칙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규율은 근대 이전과 달리 단순히 기술적인 의미를 초과하게 된다. 즉 규율이 단순히 특정 단체 또는 기관의 질서를 확립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다. 군대와 교도소를 넘어서 병원, 학교, 공장 등의 기관들은 “규율 덕분으로, 객관화의 모든 메커니즘이 예속화의 도구와 다름없는 장치들로 되게 했고, 모든 권력의 발전은 가능한 한 모든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근대적 단체와 기관들은 규율을 통해 권력을 가지고 구성원들을 객관화하여 낱낱이 파헤치고, 이렇게 쌓아올린 지식을 통해 다시 구성원들을 개인들로 만들면서 예속화하는 권력을 생산한다. 임상의학, 정신의학, 각종 심리학, 노동의 합리화 등 “분석적 학문이건 실천적 학문이건 간에 ‘정신·영혼’(psycho)이라는 어간으로 이루어진 모든 학문은 이러한 개인화의 역사적 격변 과정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권력 관계의 세련화를 통한 인식론의 해방, 새로운 지식의 형성과 축적을 통한 권력 효과의 다양화라는 이중적 과정이 있게 된다.” 규율방법의 조직화와 그에 따른 판옵티콘 체제의 등장은 근대의 다른 위대하면서도 진보적인 발명품들처럼 예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몽상적 사고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가? 근대에 들어서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병영이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이 감옥과 닮은 것이라고 해서 무엇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근대에 관한 우리의 상식은 푸코의 주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의 역사는 (비록 그것이 부르주아적일지라도)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천명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보한 것이 아닌가? 푸코 역시 이런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규율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그리고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주의적이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서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판옵티콘 권력은 “사회의 법률적 구조 심층부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권력의 형식적 틀과는 반대로 실질적인 권력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규율은 표면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명시하는 법률에 비교해볼 때 일종의 하위법의 역할에 머무른다. 일단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라는 원칙이 확립되면, 규율은 어쨌든 상호간의 계약을 통해서만 부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근대에는 적어도 노골적인 강제나 강압적인 동의가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만의 평등일 뿐이다. “규율이 부과되는 방법, 그것으로 작동되는 메커니즘, 사람들 사이의 불가역적인 종속 관계, 언제나 같은 쪽에 고정되어 있는 ‘과잉 권력’, 공통의 규정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면서 상이한 ‘성원’들 간에 이루어진 입장의 불평등, 이 모든 것은 규율 관계와 계약 관계를 대립시키고, 계약 관계가 규율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계약관계를 철저하게 변질시킬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규율의 불평등한 내용이 계약의 형식적 평등 위에 성립되는 순간, 그 모든 불평등이 평등한 개인 간의 자유로운 합의의 결과라는 알리바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노동법상 규정된 노동자들의 권리들이 실제 노동 현장에서 작성되는 근로계약서 또는 단체협약에서 무시되는 것은 바로 이런 형식의 평등과 내용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규율은 통제력을 행사하고, 스스로의 권력의 불균형을 작동시키는 그러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결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효화하지는 않는, 법률의 일시적 정지를 실행한다. 아무리 규칙을 잘 지키고 제도적이라 할지라고 규율은 그 메커니즘에 있어 하나의 ‘대안적 법률’이다. 또한 근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법치주의가 권력 행사에 한계를 부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도처에 확산되어 있는 판옵티콘 체제는 법률의 경우와는 반대로 권력행사에서, 권력의 불균형을 지탱하고, 강화하고, 다양화시키며, 부과된 한계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거대하면서 동시에 미세한 장치를 작동시킨다.” 결국 푸코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공동체 안에서 다수가 만들어내는 힘과 혼란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지배받는 다수가 가지는 힘은 권력의 강화를 위해서 쓰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는 혼란과 무질서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따라서 다수에 대한 통제는 권력의 숙명적인 목표이다. 그리고 규율은 바로 그 목표를 수행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다. 규율은 “안정의 역할”을 한다. 규율은 “여러 가지 혼란을 정지시키거나 규제하고, 온갖 혼잡과 불안정하게 돌아다니는 밀집된 집단, 타산적인 분배의 문제 등을 해결한다.” 나아가 규율은 다수가 만들어내는 혁명적인 힘들을 통제한다. 다시 말해, “집단 다수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지배적인 권력에 저항하는 반(反)권력의 여러 결과들, 즉 폭동, 반란, 자연발생적인 조직, 동맹 등 수평적인 결합에 해당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한다. 그러므로 규율은 “분할과 수직성의 방법을 사용하고, 동일 평면의 상이한 요소 사이에 가능한 한 완전히 폐쇄적인 분리 상태를 초래하여, 빈틈없는 위계질서망을 확정”한다. 물론 이러한 규율의 기능은 규율 이전의 다른 통치 방식, 예컨대 공개처형을 통한 공포의 조장과 같은 방식들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율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이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더 광대한 영역에서, 더 완벽하게, 더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벤담이 꿈꾸었던 것처럼 규율은 이제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완벽한 피라미드 형태의 그물망이 되었다.


 이 같은 규율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은 더 이상 메시아의 재림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즉, 메시아는 규율권력을 해체하지 못한다. 중심이 없는 권력, 왕 없는 권력에 대해서 메시아는 어느 누구도 단두대로 보낼 수 없다. 규율권력의 지배 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권력의 소유자가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한 채 사라지거나, 아니면 모두를 단두대에 세워야 한다.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다. 메시아는 기껏해야 법이라는 외부적 장치의 일부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메시아는 그 미미한 수준의 변혁이나마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규율권력을 동원해 길들이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메시아는 재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메시아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 없다. 규율권력의 해체라는 명목으로 규율권력을 동원하는 메시아가 과연 메시아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단지 규율권력의 반복에 불과하다. 메시아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메시아와 같은 “커다란 거부의 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푸코가 지적한대로 다양한 권력관계들의 세력선을 따라 존재하는 다양한 저항‘들’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들은 주체화하려는 권력의 작용에 대한 개개인의 실천적인 거부를 통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체화에 저항하는 주체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판옵티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저항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평등에 대한 감각에서 찾아질 수 있다. 평등에 대한 감각이란 불평등한 위계질서가 파열음을 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 불평등이 사실은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소한 실천들 속에서, 또는 우연적 실천들 속에서 감각될 수 있다.


 푸코는 판옵티콘의 도식에서 권력의 물리적 집행자 수는 최소로 수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권력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만 동시에 매우 불완전한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의 대표적인 사례인 감옥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장 완벽하게 판옵티콘적인 감옥에서는 중앙탑에 아무도 없더라도 수감자들은 권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주 우연한 계기, 아주 우연한 사건의 발생은 권력이 가장 효율화된 상황에서 가장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감자 자신은 비록 의도하지 않았지만 규율에 아주 사소하게 위반되는 행위를 우연히 수행했을 때, 비어있는 중앙탑에서는 어떠한 처벌이나 간섭도 내려오지 않는다. 수감자는 처음엔 깜작 놀라지만 이내 의아해한다. 수감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씩 대담하게 행동을 반복해본다. 바로 이 규율권력의 작동이 중지된 순간, 수감자의 의식을 지배하던 권력에는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난다. 규율권력이 최소한 과거와 비교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대의 감옥에서, 여전히 많은 수의 교도관들이 직접 감시와 관찰을 수행하는 것은 아직 규율권력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규율권력이 가장 완벽해지는 순간과 동시에 규율권력은 가장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규율권력은 중앙탑에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중앙탑에 항상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아이는 중앙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를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대체해보면, 규율권력이 판옵티콘의 도식이라는 절대적 규범이 어떤 인격도 필요하지 않다고 선포하는 그 순간 판옵티콘의 규율권력은 언제나 특수한 인격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즉, 판옵티콘은 언제나 자신의 규범을 집행하고 강제할 수 있는 담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규범을 사회의 최고 규범으로 설정하게 되면, 과연 그 규범은 무엇이고, 누가 그 규범을 결정하고, 어떻게 그 규범이 다른 형태가 아닌 바로 그 형태로 결정되었는지에 관한 물음이 무한적으로 반복되게 된다. 그 물음을 통해 최고 규범을 파헤쳐나가다 보면 결국 그것은 특수한 인격과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그 특수한 인격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헌법재판관, 대법관, 검사이다. 요컨대 푸코가 말한 “세계에서 가장 큰 재판위원회”같은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규율권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특수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더 거대한 균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규율권력은 이제 지배하는 특수한 인격과 지배받는 다수의 인격 사이의 불평등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을 만드는 데 있어서 출신성분을 내세울 수 없는 근대의 사회에서 지능의 차이는 중요한 알리바이가 된다. 시험과 훈련을 통과해 유능하고 숙달된 지배자들을 보라. 저들의 지능은 얼마나 뛰어난가. 그러나 당신을 보라. 낙제하고 미달하는 당신은 얼마나 무지한가. 따라서 당신은 지배받는 것이 적합하다, 또는 당신은 더 많은 공부와 훈련이 필요하다. ‘아직’ 당신은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규율권력이 내세우는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알리바이 역시 매우 불완전하다.


 다시 가장 완벽한 형태의 판옵티콘적 감옥으로 가보자. 이 감옥은 이제 적절히 훈련받은 명석하고 민첩한 교도관들이 규율권력과 함께 완벽하게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수감자들이 일으키는 작은 사건들은 교도관들과 자신들은 사실 평등할지도 모른다는 평등에 대한 감각을 수감자들에게 일깨운다. 감옥에서 집단적으로 탈옥하거나 교도관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된 영화들은 이를 보다 실감나게 보여준다. 수감자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낄낄대는 것, 약간의 무례한 태도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자기들끼리 하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자신들의 분노 앞에서 공포에 질린 것 등에 대한 ‘관찰’을 통해 수감자들은 아주 미약하지만 평등에 대한 감각, 그러니까 사실 교도관이나 우리나 똑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물론 평등에 대한 감각은 그저 감정적인 측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라는 감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애초에 감정과 이성이 쉽게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다는 것은 차치하자) 그러나 평등에 대한 감각은 이제 수감자들로 하여금 지능의 평등에 대한 가설을 세우도록 이끈다. 그들과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라면, 지능도 평등하다고 해보자.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능적인 탈옥과 교도관들에 대한 수감자들의 교묘한 배제와 놀림은 바로 지능의 평등이라는 가설을 실험해보는 시도들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때로는 성공할 수도,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의 성패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에 대한 감각이 규율권력이 강제하는 불평등에 균열을 내는 데까지 이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사소하고 하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들은 규율권력에 틈을 내고 파열음을 일으키는 중요한 저항의 거점들이다. 규율권력에 맞서 어떻게 주체화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평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불평등한 위계질서가 사실은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감각, 그래서 사실 인간은 평등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감각이 나타나는 때마다 규율권력은 이를 ‘정상화’하고자 한다. 자신이 놀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며 분노하는 것은 그런 정상화의 한 양태이다. 그렇기에 평등에 대한 감각을 우발성 속에서라도 감각하는 것, 나아가 그것을 진지하게 사유하며 유지해나가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메시아는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 없다. 우리 자신이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평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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