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서양철학사는 결국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의 존재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물자체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사용한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나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주어를 비워두었는데, 이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물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자체의 정의에서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 보다 간편하게는 주체의 자격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아주 작은 한 원자라도 그 원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바로 물자체인 것이다. 물론 이 거대한 우주 전체가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 또한 물자체이다. 요컨대 서양철학사의 거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바로 이 물자체, 즉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의 존재여부를 긍정 또는 부정해온 것이다. 물자체에 대한 조금 더 섬세한 스케치를 도울 수 있는 지점들 중 한 두개만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반드시 물자체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알려진 사제지간이다. 또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에 반대했던 소크라테스의 계보를 이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 반대에 위치한다고 여긴다. 이는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관한 문제가 단순히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물자체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가 물자체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 존재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그것이 만약 있다면, 물자체가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물자체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사유에서 선(善)의 이데아(idea)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임과 동시에 물자체이다. 선의 이데아는 오로지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적으로 활동한다. 선의 이데아는 존재하기 위해서 또는 활동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존재의 개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이데아들과 이성적·경험적 존재들은 결국 선의 이데아를 모사(模寫) 또는 분유(分有)한 것이지만 이러한 모사 또는 분유가 선의 이데아의 존재 또는 활동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선의 이데아에 대한 모사 또는 분유가 전혀 없더라도 선의 이데아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활동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물자체가 될 수 있는 후보는 부동의 원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운동들은 제각각 목적을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과 운동들의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목적의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순으로 목적들의 연쇄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는 무한할 수 없으므로 최종적인 목적이 존재하는데, 그 목적은 자신은 어떠한 목적도 지니지 않는 존재이고 어떠한 목적을 지닌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목적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운동의 최종적인 목적이자 그것들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러한 목적-존재를 부동의 원동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동의 원동자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물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부동의 원동자라는 단어 자체에 내재해 있다. 부동의 원동자는 실제로 최고의 궁극적 목적이자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수단과 결과를 필요로 한다. 수단이 없는 목적은 목적으로서 존재할 수 없으며, 결과가 없는 원인은 원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동의 원동자는 선의 이데아와는 달리 다른 것 그러니까 부동의 원동자에게 ‘개입’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부동의 원동자는 수단과 결과의 존재를 요구하고, 수단과 결과로부터 목적이자 원인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론 선의 이데아 역시 모든 것의 존재원인이자 규범적 토대이다. 그러나 선의 이데아는 자신에게 개입할 수 있는 다른 것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는 반면, 부동의 원동자는 그 개념에서부터 개입할 수 있는 다른 것의 존재를 요구한다. 요컨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바는 물자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동일한 의미가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든-심지어 이론적으로도(우리는 뒤에 이 표현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개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덧붙여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소피스트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일한 입장에 위치지우는 것도 가능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줄곧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되고는 하지만 동시에 물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라면 어떤 물이건 간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그 척도가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둘째, 물자체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일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부동의 원동자는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이지만, 물자체에 대한 논의에서 물자체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인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물자체의 정의는 물자체가 대체로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로서 여겨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변적 실재론 또는 비유물론의 경우를 살펴보면 물자체가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일 필요가 없음이 보다 명확해진다. 사변적 실재론 또는 비유물론은 최근에 제기되는 이론으로서 아직 확립된 이론적 사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경향을 공유하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일관되게 동의하는 것은 물자체 또는 객체에 대한 긍정이다. 원자와 같은 개별적 구성요소로도, 행위양식이나 언어게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물자체 또는 객체를 긍정하면서도 이들은 그러한 물자체를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로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여러 물자체들이 존재하며 그들 각각은 단일한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물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처럼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본질로 여겨지지 않고도 사유될 수 있다. 반복하건대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존재가 개입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물자체,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결국 긍정 또는 부정의 두 가지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플라톤과 칸트,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 또는 비유물론자들이 전자의 사례라면, 소피스트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사례이다. 물자체가 있다 또는 물자체가 없다는 두 결론은 그러나 아주 단순하고 상식적인 질문에 의해 모두 그 허점이 드러난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코 개입할 수 없는 존재, 즉 물자체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물자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아무튼 있다. 그게 뭔지도 어떤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물자체는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칸트의 이런 답변은 물자체를 긍정하는 많은 철학자들의 답변 중 가장 겸손한 케이스이다. 플라톤처럼 선의 이데아나 중세의 신처럼 무언가 내용을 채우려고 이성의 월권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문제는 물자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자체를 그 엄격하게 정의한다면, 사실상 물자체에 대한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물자체는 어떤 방식으로도 개입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한 어떤 정의도, 어떤 앎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이론적으로 물자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에 빠져버리게 된다. 설령 그 내용을 미지의 상태로 남겨놓더라도 물자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순간, 우리는 물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의 존재를 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물자체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물자체에 대해 이론적인 개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물자체는 더 이상 물자체가 아니다. (덧붙여, 물자체의 존재를 아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며, 이는 물자체의 존재를 아는 나의 존재를 아는 나…와 같은 식으로 무한퇴행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물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떨까? 물자체가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물자체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물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물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하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한다. 누군가 집에 우산이 있느냐고 물어볼 때 우산이 없다고 답하려면 먼저 우산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우산이 집에 있는지 찾아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알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부정론자들은 긍정론자들이 먼저 걸려들었던 함정에 뒤이어 빠져들게 된다.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대한 물음은 애초에 그 물음에서부터 답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물자체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정의하려는 순간 이미 물자체는 물자체일 수 없고 이론적 구성물이 되어버린다. 즉 물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물자체는 사유하는 사람 자신의 존재에 따라 물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니체가 서양철학사에서 가지는 독특한 위치는 바로 이 점을 명확하게 포착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는 물자체를 사유하려는 어떤 시도도 결국 사유하는 사람 자신의 권력의지의 산물임을 특유의 장황하고 난해한 문체로 풀어낸다. 다시 말해 물자체를 사유하는 사람은 물자체일 수 없는 것을 물자체로 구성해낼 뿐이며, 그것은 사유하는 사람 자신의 권력의지, 즉 자신을 물자체에 대한 앎을 가진 자로 만들려는, 그럼으로써 앎과 무지의 분할선을 그려내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이든 부정이든 물자체의 존재여부를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물자체를 그처럼 이론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된 시도이다. 니체는 아주 솔직한 태도로 말한다. “물자체가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니체는 물자체의 존재여부를 인식의 영역에서 믿음의 영역으로 이전시킨다. 그리고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한다. 때로는 잔인하고 동물적이라고도 여겨지는 니체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부터-필연적으로는 아니지만-나오는 것이다.
물자체의 존재여부를 인식의 영역에서 믿음의 영역으로 이전시키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물자체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는 것이다. 물자체가 증명된다는 것은 연역이나 귀납 등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론적 추리로써 물자체의 존재여부를 밝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모순이다. 반면 물자체가 입증된다는 것은 과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러한 가설에 따라 도출되는 결과들을 통해 실재하는 사실들이 설명될 수 있을 때 그 가설은 입증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실험자가 그 가설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니체는 물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이 참이라고 믿었고,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가설삼아 실천하였으며, 그 결과들을 통해 현재의 사실들을 탁월하게 설명해냈다. 니체의 계보학적 작업은 바로 이러한 입증의 하나이다.
둘째, 입증의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완벽한 인식을 얻는 것이 아닌 믿음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하건대 이론적 인식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순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그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 또는 가설을 입증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믿음이 더 타당한가는 가려질 수 없다. 만약 두 믿음 사이의 우열을, 그럼으로써 더 타당하고 더 많은 진리치를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가지려는 순간 우리는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믿음은 단지 겉 포장지에 불과할 뿐 다시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대한 물음이 불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믿음이 더 참이라면, 그래서 물자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진리라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피히테는 바로 이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피히테 역시 니체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앎, 즉 지식의 영역에서 물자체에 대한 답이 얻어질 수 없다는 것, 나아가 그 물자체에 대한 물음 자체가 모순된 것임을 명확히 알았고, 따라서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대한 물음은 믿음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실천만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피히테는 물자체의 존재를 믿음과 동시에 그 믿음이 만들어낸 황홀경에 너무 깊이 도취되어버린 나머지 그것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원점으로 되돌아 와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한 가지뿐이다. 물자체의 존재여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어떤 실천이 가능할 것인가? 물자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믿음과 부정하는 믿음은 어떤 실천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요컨대 물자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씨앗으로부터 어떤 ‘철학의 나무’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 나무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자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씨앗이 어떤 싹을 틔우는 지에 집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