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제주 시골 일상 #4
며칠 전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햇볕도 따사롭던 날, 우리 가족은 각자 현관을 열고 집과 운영하고 있는 숙소를 정리하고 마당의 풀을 뽑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무리의 할머님들이 집 앞을 지나가셨다. 인사를 드리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려는데 아래 동네에 살고 계시는 친척 할머님께서 집 텃밭에 무를 뽑아줄 테니 일 마치면 들러 가져가라고 하셨다. 된장국에 넣어도 맛있고 무채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고 생선조림에 깔아도 맛있는 무! 아내는 텃밭에서 주신다 하시니 봉지 하나만 가져가면 될 것 같다고 했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스케일이 범상치 않음을 몇 번 경험한 나는 집에서 제일 큰 바구니인 이케아 비닐 바구니를 챙겼다.
역시나 예상대로 바구니가 가득 찰 정도로 무를 선물 받았다. "거 보기엔 쪽아뵈도 막 달고 맛있는 거라이." 구수한 사투리로 무를 주신 할머님은 몇 달 전 쓰러지신 이후로 김치를 담그는 게 너무 힘들어지셨다고 했다. 그래도 지팡이에 의지해 힘들게 걸어 다니시던 모습이 아직 선한데 이젠 지팡이 없이도 걸으시고 무도 뽑아주시고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았다. 할머님께 대략적인 무김치 담그는 비법을 전수받고 그 집 형님이 채취하셨다는 겨우살이에 대한 자랑과 며느리의 출산예정일 등의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먼저 무의 무청을 잘라내어 바람이 잘 드는 그늘에 널어 두었다. 얼마 전 마트에서 무청시래기를 사 밥도 지어먹고 된장국도 구수하게 끓여 먹었는데 이렇게 우리가 직접 만들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할머님이 편찮으신 몸으로 키운 무를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무의 양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너무 조그만 몇 개만 국이나 조림에 넣을 용도로 빼놓고 큼직하게 썰어 내가 좋아하는 무김치를 담그기로 결정했다. 할머님은 꼭 뉴수가를 많이 넣어야 한다면서 뉴수가도 챙겨주셨지만 우리는 단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뉴수가는 조금만 넣고 소금을 적당히 넣어 무를 절였다. 무를 적당히 절인 뒤 물기를 빼고 통에 담아서 하룻밤을 건조했다.
다음날 건조한 무에 넉넉하게 고춧가루를 뿌려 버무려 먼저 색을 입혀 주었다.
양념에는 찹쌀풀을 곱게 쒀서 넣었다. 뉴수가를 넣는 대신 단맛을 주기 위해 사과와 배를 갈아 넣고 장모님이 주문하셨다며 주신 맛난 새우젓과 마라도 멸치액젓을 넣었다. 무김치에는 풀을 넣지 않아도 된다고는 하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무김치에 신이 나서 귀찮은 줄도 모르고 풀을 쑤어 넣었다. 다만 물의 너무 많았는지 풀이 묽게 쑤어진 것은 많이 아쉬웠다.
대망의 버무리기, 쪽파를 추가하고 양념을 넉넉하게 부어서 바락바락 주물러 무김치를 완성했다. 겨울이라 상온에 4일 정도 두었더니 익은 냄새가 나고 맛있었다. 첫 무김치라 많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우연히 만든 첫 무김치의 맛 치고는 괜찮았다.
무김치를 개시한 어제 이후 오늘 저녁밥상에도 무김치를 올렸다. 칼칼한 갈치조림의 비릿한 한입, 따끈한 흰쌀밥을 한입, 목이 막힐 타이밍에 무김치를 아작하면 너무너무 맛있었다. 내일을 오늘 귤밭에서 캔 냉이로 된장국을 끓여서 밥 한 그릇 든든히 말고 또 무김치를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