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앉아서 할아버지와 둘이 한참을 얘기를 나눴다. 우리 할아버지는 85세이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리지만 보청기는 굳이 끼지 않으신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크게 얘기하고 몇 번 더 얘기하면 대화하는데 문제는 없다. 누구보다 잘생기고 모자와 옷을 좋아하시는 멋쟁이시고 날 사랑하신다. 오늘은 할아버지 핸드폰 앨범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말씀을 하셨다.
"이때가 코로나 터지기 전에 니 삼촌이랑 갔던 덴데 너무 좋았어 여기가 어디드라 여기 어디었지"
"해외예요?"
"으응 여기 너무 좋더라고"
"태국인가?"
"아니 아니 어디드라"
"아 베트남?!"
"아하하하 맞다 맞아" 할아버지가 웃으신다. 내 마음에 꽃이 피는거 같다.
"여기는 그 곤지암 아니 화담숲이야 여기가 가을에 가면 너무 이쁘더라고 봄에 가도 어찌나 꽃이 어찌나 예쁜지 몰라요"
"여기 너네는 안 갔지, 여기 울산바위인데 너무 멋있어 꼭 가봐야 해"
"이게 올림픽공원이야. 올림픽공원 한 바퀴 돌면 꽤 운동된다. 꽤 힘들어요." "여기는 봉은사 네 할머니랑 갔던데." "여기 강원도인가 갔던 덴데 외삼촌이랑 갔었다"
여기저기 그동안 다녔던 곳들을 보여주며 어땠는지 말씀하시는데 할아버지와 같이는 안 갔어도 나도 다 가본 곳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에 이모들, 삼촌들은 있어도 나와 할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와 같이 여행을 안 다녔었나. 밑으로 사진을 쭈욱 내리는데 마침내 사진이 있다. 몇 년 전에 졸업식 사진이었다. 학위복을 입은 내 모습이 여러 장 있었다. 이상하다.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너무 예뻐 보였다. 할아버지가 내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는지 정면을 보고 웃는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사진 속 내 모습은 예뻤다. 이게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내 모습이구나. 그리고 자전거가 취미이신 할아버지는 자전거 타는 사진들이 꽤 많다. "할아버지 같이 타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나는 혼자 타는데 타다가 운동하는 사람들한테 가끔 찍어달라 그래. 그럼 잘 찍어줘" 아아 혼자타도 이렇게 멋진 모습들을 찍어주는 사람들이었어서 다행이다. "자전거 타고 양평까지 갔다 오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집에서 나가가지고 잠실대교 밑에 지나면 그때 해가 뜨기 시작해. 그래서 양평까지 앞사람 따라가면 2시간 정도 걸려" 우리 할아버지는 나이가 여든다섯이신데도 날씨가 좋으면 왕복 네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다니신다. 팔당댐도 자전거로 다니시고 여의도도 가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옆에서 할머니가 "네 할아버지는 자전거가 자가용이다. 혼자 안 가본 데가 없다" 이러신다. 설날엔 우리 외가댁 친척들이 전부 다 모이면 열여덟 명이다. 서로 각자 할 말 하며 웃느라 시끄러운 와중에 할아버지는 멀리서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으신다. 그리고 그렇게 핸드폰의 앨범을 켜서 종종 우릴 찾아보시나 보다. 우리 할아버지랑 얘기하다 보면 내 마음속 걱정이 다 사라진다. 단지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우리 곁에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눈을 코를 입을 얼굴을 괜히 한번이라도 더 바라본다. 내가 할아버지를 그릴 때 붓터치 하나하나 오래 건강하게 계시라는 바람을 담았던 것처럼. 이렇게 건강하게 내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