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 한 접시에 발목 잡힌 치앙마이의 밤.

레오 맥주와 버스킹, 그리고 망고 주스 컵에 적힌 낯선 예보.

by 나들레



동남아시아의 밤은 낮보다 길고,

치앙마이의 밤은 낮보다 화려했다.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나면 도시는 비로소 숨겨두었던 매력을 꺼내 보였다. 나는 그 은밀한 초대장에 이끌려 핑강 근처, 타페 게이트 인근 '나이트 바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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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미리 살펴본 그 거리는 마치 서울의 용산구 한남동이나 성수동처럼 다른 동네와 사뭇 다른 세련된 활기로 가득했다. 힙한 카페와 전시관 사이로 젊은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고,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다시 스무 살의 계절로 돌아간 듯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어둠이 짙게 깔린 뒤부터 시작되었다.


첫날 나의 발길이 멈춘 곳은 '깔래 야시장'이었다. 현지인들의 삶과 여행자의 설렘이 묘하게 뒤섞인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의 꼬리표를 떼고 조용히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화려한 기념품들 사이를 지나쳐 내가 도착한 곳은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늘어선 노점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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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노점 사이에서 이 밤의 진짜 주인공은 단연, 치앙마이에서 매일 탐닉했던 꼬치구이였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듯한 육즙의 향연. 그리고 뜻밖의 수확은 만두였다. 평소 만두를 즐기지 않던 나였지만, 그날따라 달궈진 철판 위에서 바싹하게 익어가는 만두의 자태가 유독 눈부셨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맛본 딤섬보다도, 한국의 그 어떤 만두보다도 강렬했던 한 점. 그 맛에 발목 잡혀 결국 다시 그곳을 찾게 될 줄은 그때의 나도 몰랐을 것이다.


그 완벽한 안주 곁에는 언제나 차가운 레오(LEO) 맥주가 있었다. 혼자서도 기꺼이 잔을 기울이는 애주가인 내가 가장 편애하는 술. 평소 메뉴판 앞에서 유독 작아지던 나였지만, 이 쌉싸름하고 황금빛 액체 앞에서만큼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버스킹 공연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를 잡고 앉아, 흐르는 선율을 안주로 삼아 맥주 한 병을 거뜬히 비워냈다.


치앙마이의 버스킹은 특별했다. 연륜이 묻어나는 연주자들 손끝에서 피어오른 선율은 내 안의 잠잠하던 심금을 가만히 두드렸다. 가사를 몰라도, 혹은 낯선 편곡일지라도 그 울림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해서 나는 몇 번이고 지갑을 열어 기꺼이 감사의 마음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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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촉촉해진 마음으로 시장 한쪽을 돌아보았을 때, 공기는 순식간에 뜨겁게 달궈졌다. 격렬한 무에타이 경기가 한창이었다. 성별과 국적, 나이를 불문한 선수들이 큼지막한 사진 속에서 결연한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링 위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숨소리와 관객들의 열기. 하지만 평소 격투기를 무서워하던 내게 그 에너지는 조금 과분한 온도였던 모양이다. 서둘러 시장 밖, 조금 더 낮은 온도의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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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래 야시장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벗어나 타페 게이트 근처로 접어들었을 때, 전혀 다른 결의 풍경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고운 태국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미스코리아 선발전처럼 수줍게 자기소개를 하고 매력을 발산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 같았다.


조금 전 무에타이 경기장에서 느꼈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는 나였기에, 그 순수한 몸짓에 홀린 듯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예쁜 아이들이 온 마음을 다해 전하는 인사는 계획에 없던 그 길 위에서, 나는 치앙마이가 아껴두었던 가장 순한 곁을 내어준 것만 같아 그곳을 한참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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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찾아간 'PHAPLOEN MARKET'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전날의 시장이 생활감이 묻어나는 현지다운 풍경이었다면, 이곳은 현대적이고 정갈한 낭만이 흐르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 위로 아른거리는 주황빛 조명들은 마치 누군가 그려놓은 수채화 같았다.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보다 더 깊이 내 마음을 건드린 건, 다름이 아닌 사람들의 온기였다. 매년 11월, 러이끄라통' 축제를 앞둔 시기여서였을까. 망고 주스를 건네주던 주인은 투명한 컵 위에 정성 가득한 손 글씨로 "Happy Loy Krathong"이라 적어주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건네는 그 작고 다정한 축복 앞에서, 나는 차마 주스를 바로 마시지 못한 채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만 보았다.


한 달 살기의 마지막 사흘, 나는 마치 출석 도장을 찍듯 매일 밤 나이트 바자로 향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기 직전까지도 나는 그 거리를 서성였다. 유명하다는 선데이 마켓이나 토요 마켓의 북적임보다, 나는 이름 모를 상인의 손 글씨와 연륜 있는 악사의 기타 소리가 있는 이 야시장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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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았던 마음의 실체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걸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건, 망고 주스 컵 위에 주인이 남겨준 그 짧은 손 글씨였으니까.


"Happy Loy Krathong"


그 다정한 예언 덕분이었을까. 이어지는 치앙마이의 밤은 단순히 해가 진 뒤의 시간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빛깔의 밤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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