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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노래 Oct 13. 2022

술에 진심인 마을

추억의 맛

스물셋. 나는 그때를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고, 가장 잘 마셨던 시기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었고 비로소 술맛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그 시절 내가 살던 동네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 해, 나는 일본의 작은 마을에 살게 되었다. 1년간 교환학생으로 지내게 된 것이다. 그 마을은 시코쿠(四国)라는 섬 안에 있었고 도쿄에서는 버스로 12시간, 오사카에서는 버스로 8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남쪽으로 걸어 나가면 태평양이 펼쳐지고 북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울창한 삼림이 펼쳐지는 그런 곳. 


그렇게나 시골이다 보니 외국인을 보기가 어려웠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관심과 호의를 받았다. 이미 5~6년 전에 인기 있었을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의 욘사마 신드롬이 이 동네에서는 이제 막 시작된 덕분이었다. 사실 도쿄의 한류 중심지인 신오쿠보(新大久保)에 가면 냉면부터 삼겹살까지 없는 한식이 없었고, 오사카의 번화가 도톤보리(道頓堀)에 가면 지나가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한국 관광객인 시절이었는데도 이 시골에서는 유명인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은 누군가 열심히 뒤를 따라오더니 한국인이냐고 묻고는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가고, 어느 날은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분이 한국인이냐며 맛있게 먹고 가라고 술값을 대신 계산해주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 지낸 일 년 동안 술맛을 알게 되었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한데, 이 작은 시골 마을이 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인을 만나서 고치(高知)에 산 적이 있다고 얘기하면 일단은 ‘나도 가본 적 없는데’라는 반응을 보이고 그 다음은 ‘고치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실제 통계로도 이곳은 일본의 47개 행정구역 중 음주 비용이 가장 높고, 상점가에 나가보면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내숭이 없었다. 대낮부터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보는게 어렵지 않았는데 그게 묘하게 이 동네에 대한 긴장을 풀어줬다. 그 안에 머물면서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학가에서 몇천원짜리 안주에 소주나 마셔대던 나에게 일본의 술 문화는 신세계를 보여줬는데, 그 촌발 날리는 시골에서도 카시스를 넣은 칵테일이나 '사와'라는 과일향이 나면서 스파클링까지 들어 있는 술 등 소주보다 세련되고 쉽게 마실 수 있는 술들이 많았다. 학교 근처에 주로 찾는 술집에는 노미호다이(飲み放題)라고 해서 일정 금액을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건 혁명이었다. 가게마다 금액은 달랐지만 2천엔(이만 원 정도) 정도를 내고 들어가면, 일본인 친구들은 두어 잔 마시고 취한 것 같다고 술을 사렸지만 유학생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다섯 잔, 여섯 잔, 눈치 보일 때까지 마시다가 나오곤 했다. 술 먹는 것 외에는 마땅히 하릴없는 동네인지라 저녁마다 술 약속도 어지간히 잡아댔다. 한국 요리를 만들어준다는 구실로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일본 요리를 얻어먹겠다며 일본인 친구의 집을 돌며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나 혼자였다면 방안에 콕 박혀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빨리 도시로 가고 싶다며 징징댔겠지만, 사교적인 룸메이트는 학교에서 한두 번 대화한 사람과도 용케 술 약속을 잡아 와서 정말 외로울 틈 없이 활동적이고 시끄러운 밤들을 보낼 수 있었고 술을 떠나 소극적인 내 성격도 많이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 동네에서 마신 많은 술 중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히로메이치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다. 히로메이치바는 아케이드 형태로된 재래시장이다. 과일가게, 야채가게, 정육점 등 시장에서 볼 수 있는 가게들이 시장의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정중앙은 뻥 뚫린 광장으로 테이블들이 놓여있고 그 주변을 술을 파는 음식점들이 둘러싸고 있다. 마치 푸드코트처럼 원하는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비어있는 자리에 대충 앉아 취식을 하는 형태였다. 나는 이곳을 고치의 옥토버페스트라고 불렀는데 일단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맥주를 마시는 풍경이 너무나 자유롭고 좋았다. 샤로수길에서 술을 마실 때, 옆 테이블에서 70대 할아버지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홍대에서 술을 마실 때, 그 가게 안에 50대 여성그룹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히로메이치바에서는 할아버지도 엄마도 내 동생도 술을 마시고 있다. 그 점도 좋았고 대충 원하는 음식을 가져다가 먹는 점도 좋았다. 사케가 땡기는 날은 가츠오다다키에 사케 한잔, 맥주가 땡기는 날은 가라에게에 맥주 한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곳이고 그 점이 그 곳을 더욱 사랑하게 했다.


아, 가츠오다다키 땡기는 밤이다. 일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한번쯤 고치라는 작은 마을을 떠올려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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