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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maseve Feb 13. 2024

그.삶.안 I

마크 로스코: 그래서 이 그림은 얼마인데?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아직까지 '탐험'이다.

처음 그 강렬했던 거대한 노란색의 압박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인께 인테리어 아이템으로 선물하기 참 좋겠다.' 였다. 워커홀릭의 그녀에게 그림을 마주하는 잠시나마 휴식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단정해(?)보이는 그림, 하지만 컬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항상 지치고 피곤하여 눈이 퀭했던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기운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약 10년간 '마크 로스코'의 이름만 들어도 난 마치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듣는 것 처럼 반응한다. 그런데 솔직히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로스코의 작품들을 상시 특별전시하는 미술관들을 둘러보아도, 그의 특별전에 찾아가거나 책을 찾아보며 그의 행적을 톺아보아도, 붓을 든 철학자와 같은 그가 그림을 통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다.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의 마크 로스코 특별전을 다녀오던 날, 친구에게 내가 찍어 온 사진 한장을 보냈다. 그는 언젠가 다른 갤러리에서 빨간색의 로스코 대표 작품을 보고 왔던지,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작가의 이름을 찾아 한참 기억 속의 어느 틈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게 물어왔다. '그래서 이 그림은 얼마인데?'


'Silence is so accurate.'

요즘의 미술전시는 이전에 비해 무척 친절해진 덕분에, 그림을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마크 로스코'를 잘 모르겠는 나에게 그의 그림은 어쩌면 읽을 거리의 여지를 많이 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침묵'은 그 수많은 여지들 중 하나였다.

흔히, '로스코의 방'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작품만이 전시된 공간들을 들어가보면,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관람자들을 감싸안는 느낌이 든다. 한창 미술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단색화'들과도 컬러 때문인지, 구성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차별점이 말로 설명하기 어렵게 존재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작품들이 주는 '침묵'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나처럼) 제각각의 감상평들과 비판들을 쏟아내는 가운데, 작가 본인은 절대 스스로 '침묵'만으로 일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한 나를 웃음 터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얼마인데, 10억정도?' 라고 재차 묻던 친구는 결국 이 말로 작품 감상을 마쳤다.

'이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

모두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은 왜 같은 가격이 책정되지 않는걸까 라는 질문까지 했다면, 나는 마치 작가 혹은 갤러리스트라도 되는양, 말도 안되는 금액으로 사기치다가 걸린 것 같은 어떤 기분으로 약간은 구차해질 변명을 늘어놓았을까 라고 자문해 보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로스코의 생애와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해야할까, 아니면 짧고 굵게 그가 네 모서리가 둥글러진 거대 사각형에 담은 의미를, 각기 다른 컬러 조합의 의도를 함께 찾아봤어야 했을까.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사지 못할 그림이지만, 내게 그만큼의 여력이 충분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여, 로스코의 그림을 한 점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소도시의 작은 미술관에 기증하게 되지 않을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수많은 것들, 그것이 작가 스스로 말했던 Cataclysm (대재앙) 이든, 생기 돋는 힘찬 기운이든, 혹은 '이건 나도 그리겠다.' 하고 당장 누군가가 미술관을 박차고 나가 붓을 잡게 하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림을 볼때 잠시 침묵해도 좋음을 깨닫게 되는 기회도 있을 수 있겠지.

<사진, 28 January 2024 at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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