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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maseve Feb 15. 2024

그.삶.안 IV

마크 샤갈: 내 눈 안의 콩깍지

'그.. 닭 잘 그렸던 화가가 누구지?'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직장 선배가 물어왔다.

'피카소요?' 

'그으- 사람들이 막 날아다니고..'

'아- 샤갈이요?'


내 기억에는 샤갈이 닭을 그린 적이 없는데, 염소라면 모를까.. 어쨌든 우리는 일과 중 나른한 오후에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한참이나 서로의 흥미거리들을 나누고 있었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방랑자 환상곡'을 LP로 들었을때의 '환희'..랄까, 정확히 이 단어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느껴졌다. 책에서 고작해야 컬러 도판으로 보던 그림을 소장된 미술관에 찾아가 직접 보는.. '희열'이라고 해야하나?


좋아하는 화가를 묻는 질문에 이제는 꼭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인데, 그의 그림에 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고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특히, '에펠탑의 신랑신부'로 알려진 그림이나 '산책', '생일' 등에서 그가 거의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그렸던 주제, 하늘을 날고 있는 커플의 이미지는 내 눈에 꽤 익숙하다고 자신했었다. 염소를 또한 샤갈의 시그니처와 같이 기억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악기 첼로와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미술에는 문외한이나 최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하던 선배는 나와는 다르게 샤갈의 그림에서 '닭'을 가장 먼저, 그리고 인상 깊게 보았다. 그러고보니, 닭을 기억은 커녕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내가 이상해질 정도였다. 이 그림을 얼마나 많은 지인들에게 입이 닳도록 소개해왔는가, 게다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영화라고 혼자만의 생각을 간직한 '노팅힐'에서 주인공 남녀를 결정적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근데 저거 진품이겠지? 하는 친구의 질문에 그제서야 정신 차리고 뛰쳐나가던 휴 그랜트의 등짝이 얼마나 순수해 보이던지.. 시종일관 소극적이었던 그가 마침내 불사조처럼 줄리아 로버츠에게 돌진해 가던 길을 열어 주었지, 역시 그림의 힘!) 


이 날아다니는 커플을 그린 그림들은 샤갈만의 신비로움을 논할 때면 가히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라 손꼽고 싶다. 유구한 미술사에서 특정 사조로 구분 짓는 것이 아예 불가한 화가들이 몇몇 있으나, 애매하게 여기저기 문어발이 걸쳐져 있는 느낌이 들게하는 작가들은 소위 '아류'로 친다해도, '모방'이 분명할텐데 완전히 새 것과 같으며 전무후무한 작가만의 색깔을 진하게 그것도 오래 유지했던 화가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 중 샤갈은 아주 고급진 모호함을 우아하게 버무린 선구자가 아닌가 싶다. 굳이 단어를 만들어본다면, '샤갈리즘'이라 해볼까?  


Surrealism + Cubism + Fauvism  = Chagalism?

20대엔 특히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에 완전히 미쳐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원화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이 없는 상황에서 더 안달이 났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있으나 아주 현실적이지 않는 그의 작품들에 항상 붙여지는 '초현실주의'라는 수식어가, 매일을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 터널을 힘껏 달려가는 심정으로 살아가던 당시의 나를 꿈결같이 어루만져주곤 했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에서 흘러내릴 듯한 벽시계의 이미지는 내가 버티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현재'를 어쩌면 조금 유연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여전한 감정으로 피카소의 조각난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어디를 향해 가야할 지, 터널 끝 한줌의 빛을 조금씩 인식해가고 있던 즈음이었다. 모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피카소가 다각도로 그려놓은 그림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틀렸다고 했더라도 나에게만은 옳았다. 오히려 다르게 보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 또 다른 '휴머니즘'의 일면이었고, 그러한 시대를 불과 몇년만에 마주했었다. 그러자 폭발하듯 분출되는 감정들이 앙리 마티스의 그림들을 통해 읽히기 시작했다. 바보같게도 나는 스스로에게 참으로 모진 사람이었다. 실패를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못했고,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무거운 과거들을 억눌러 쌓아두기만 했었다는 것을, 마티스의 짧고 굵은 붓터치와 강렬한 컬러 선택에서 선명하게 깨달았다. 


샤갈을 좋아하는 화가로 손꼽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년이 채 안된다. 지금 나는 20대의 그것과는 다른 결의 꿈을 꾼다. 매일매일 작은 실패들에서 패배감 보다는 가능성을 보려고 노력하고, 그보다 더 작고 소소한 성공들은 스스로에게 훨씬 크게 치하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본다. 이렇게해서 나의 우물이 마르지 않고 더 커지기를 바라지만, 한계는 분명 있다. 인간 본연의 한계는 나란 인간에게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결국 나도 내가 보고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고야마는 것이다. 내 안목의 지평을 늘려본들, 뒷통수에 눈을 박아 넣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너무 뻔한 변명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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