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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maseve Jun 25. 2024

그. 삶. 안 VIIII

살바도르 달리: 얼만큼 나를 사랑하면 정상일까

3월이 벌써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서울보다 대체적으로 따뜻한 줄 알았던 이 동네는 삼한사온의 정도가 지나쳐 '삼여(름)사겨(울)'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몇 주가 지나간다. 이사를 한다고 정신 없이 보내는 가운데, 며칠은 여름 날씨였다가, 또 며칠은 겨울과 같은 날씨에 몸도 적응을 못하는 듯 싶게 축축 쳐지는데,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길에는 봄꽃 들이 속절없이 만발해져만 간다. 워싱턴DC, 특히 새로 적응 중인 동네에선 걷는 걸음 걸음 마다 수선화의 격한 환영을 받게 된지 수 주가 지나고 있는 참이다.


그러고보니 서울의 우리 동네 공원에도 수선화가 듬성듬성 있었지, 하고 서울에서 만났던 꽃들을 기억에서 되살려보니 왜인지 미국에서 만나는 수선화의 꽃봉오리들은 유독 고개를 쳐들고 활짝 펴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너네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거 아니.. 었어???'


수선화, 나르키소스의 분신

겸손이 미덕인 문화가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고 자라, 그 미덕에 여전히 물음표가 그득한 나라에서 삶의 절반 이상을 보냈던 나에겐 '자기 사랑'이란 이해하기도 참 어려운 말이었다. 스스로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어버린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나르시시즘, '자기애'라는 말 자체를 병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나르키소스의 그림을 그린 여러 화가들 중, 특히 카라바지오와 살바도르 달리의 인생은 이기심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였기에, 더더욱 '자기 사랑'이라는 맥락을 나는 충분히 만끽하지 못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객관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난 내가 귀여운 것 같아.' (I think I'm cute.)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미국인 친구를 대할 때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이건 무슨 근자감인가 싶을때 달리의 '나르키소스의 변형'이 생각났다. 기존의 나르키소스 그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을 따라간듯 하지만 또 다르게 달리만의 무엇이 있었던 그림, 그래서 누가봐도 '봐! 나,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그림이야!'라고 외쳐대는 듯한 그림. 하지만, 달리의 나르키소스는 물 속으로 곧 빠질 것만 같이 위태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나에게는 그저 물가에서 깊이 사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달리의 두 자아

달리의 알려진 개인사에서는 그가 어릴 적 부모로부터 죽은 형의 존재를 대신할 것을 종용받았다는 것이 왕왕 거론된다. 그렇다면 이 그림, 달리의 '나르키소스의 변형'에 등장하는 두 등장인물은 스스로 자각하는 자기자신과 남들이 보는 자기자신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인간의 몸의 형태로 그려진 모습과,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알을 집고 있는 듯한 형태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차이점이라면 알에서만 수선화가 피어 나왔다는 점일 것이다. 자기애의 절정,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 꽃이.


남들이 보는 내 자신과 내가 보는 내 자신의 괴리는 보통 나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심지어 칭찬, 관대한 말들에서도 나는 상처를 받거나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달리는 이 그림에서 타인이 보는 자아를 죽임으로써 결국 내 존재의 당위성을 입증시킨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고보니, 이 방법을 적절하게 써보는 것도 건강에 이롭겠다. 지금 나는 어떤 자아를 좀 더 살려볼까? 하는 맥락으로 말이다. 


수선화가 활짝 피어있던 시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한껏 뽐내던 친구는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터널속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서로 다른 자아들의 외침에서 내면의, 자기 자신만의 자아의 손을 들어준 듯 싶다. 그 속에서 진짜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맑은 호수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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