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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 Ko Feb 04. 2021

연필과 글쓰기 작업실

제주 종달리의 작은 가게, 필기

가게 이름처럼 필기할 것들이 모두 모여있는 종달리의 ‘필기’. 문구류 덕후거나 나처럼 조그마한 상점에 가는 걸 좋아한다면, 꼭 가봤으면 하는 공간이다.


여러 번 종달리를 와봤지만 이렇게 8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 숨어 있을 줄 몰랐다. 문을 들어서자 “안녕하세요”인사 소리마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 데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색색깔의 연필들이 제발 나를 데려가 달라는 신호를 보내 듯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빈티지한 디자인부터 클래식한 디자인까지 다양한 연필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렇듯 놀라운 연필의 세계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연필의 사각사각 소리를 좋아하는 난 그림 그린 후 마지막에 서명을 하거나 혹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할 때 주로 연필을 사용한다. 손에 쥐어지는 그립감과 종이에 닿을 때의 미끄러지는 정도는 연필을 고를 때 내겐 중요한 부분이다. 그 두 가지가 충족됐을 때 나에게 맞는 연필을 찾은 느낌이랄까. 서명을 할 때 그림에 방해가 되지 않는 걸 좋아해서 연필의 진하기 또한 구매 시 따지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 까다로운 요구사항이 많아서 인지 내가 사고 팠던 연필들은 다른 연필들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좋아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감사하게도 연필을 테스트해 볼 수 있었다. 열심히 종이에 서명을 했다. 누가 보면 마치 다녀간 걸 티 내려고 낙서하는 것처럼 보였을 듯.


한 자루에 5천 원부터 만원이 넘는 연필까지 다양하다. 내 친구가 그러더라, 무슨 연필 한 자루에 만원씩이나 하냐며 그걸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이해한다. 나 역시 연필에 관심 갖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으니깐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건 정해져 있는 기준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살아온 경험에 의해 좋았던 기억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게 아닐까. 어떤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직 그 좋았던 기억들을 쌓을 경험이 없거나 끌리는 취향이 다를 뿐인 것이다. 그러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닐지라도 자신에게 삶의 환기를 시켜주는 거라면,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긴 거니깐.

물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처럼 특정 물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지양하지만, 취향이라는 건 내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니깐 말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대사, “My precious”


가게가 끝날 때쯤 간 거라 마침 손님이 나 혼자였다. 누가 가져가지도 않는데, 고른 연필들을 계산하기 전까지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내가 산 연필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지우개가 같이 붙어있는 연필들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우개가 붙어있는 연필이 좀 더 실용적이라고 느낀 달까. 심지어 가끔은 연필보다는 연필 위의 지우개에 욕심을 낸 적도 있다. 깨끗이 지워지는지, 지우개 가루가 많이 나오는 건 아닌지, 지우고 나서 종이에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지를 따진다. 내가 봐도 연필에 좀 진심인 것 같다.

한마디로 까탈스러운...


물론 지우개는 테스트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라 그동안의 경험과 눈대중으로 지우개의 촉감이나 말랑 거리는 정도를 나름 괜찮은 지우개를 가려낸다. 그럴 시간이 없다면 다양하게 선택하는 게 지혜로운 방법일지도.


디자인부터 다양한 연필의 세계에서 그중 내가 좋아하는 건, 블랙 윙 연필. 사실 브랜드 이름을 아는 거라곤 아직 블랙 윙뿐이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값어치가 나갈 것 같은 느낌은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조금 고가이다. 다른 연필에 비해 필기감이나 연필의 재료가 달라서 인지, 혹은 분기별로 발매하는 한정판 연필이라 고가의 가격인 게 아닐까 나름 추측을 해본다.

가격이 조금 고가이어도 내가 이 연필의 대한 만족감이 높다면 투자할 만할 것 같다.


2019년 8월에 나온 연필 하나를 골랐다.

블랙 윙 볼륨 42, 재키 로빈슨 연필.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과  장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헌정된 연필. 42는 영구 결번된 그의 등 번호를 상징한다고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래, 이 연필이야, 내게 필요한 연필! 이 아이로 열심히 작업을 해야겠어.” 운명처럼 끌린 그 연필을 드는 순간 게으름의 톱니바퀴에서 날 끄집어 내줄 구원투수를 만난 것 같았다. 새 하얀 유니폼에 파란 모자를 연상시키는 연필의 디자인은 내가 아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유니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재키 로빈슨이 소속되었던 팀이었다. 연필 한 자루에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려지다니, 그 연필을 쓸 때마다 재키의 순수한 열정이 떠오를 것 같다.




이틀 연달아 다음 날에도 ‘필기’를 찾았다. 전 날 갔을 때 연필을 파는 공간 옆에 작은 글쓰기 작업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예약을 받아 작은 공간을 내어준다는 걸 보고는 연필을 사러 간 날, 바로 다음날로 예약했다. 작은 두 책상 위로 나란히 놓인 레트로 느낌의 옛날 타자기와 종이들 그리고 연필이 놓여 있었다. 작업실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타자기와 손글씨로 적은 듯한 문장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아날로그가 흐르는 공간에서 글쓰기 작업실이라니, 어떤 글쓰기 작업실인지는 사실 알지 못했지만 조금 설레었다.
“두 책상 중 맘에 드는 자리를 고르시고 준비가 되시면 알려주시면 돼요” 준비되면 알려달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엇, 마음의 준비까지?’ 잠시 머뭇거리다 “네, 준비됐어요.”라는 대답에 섞인 민망한 웃음소리에 사장님도 같이 웃으셨다.

20분 정도 타자기 사용 방법을 알려주셨다. ‘20분이나 설명을? 타자기는 그냥 치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었지만 오산이었다. 타자기의 타 자도 모르는 거였다. 타자기에 종이를 넣는 것부터 자판을 다루는 방법까지, 난생처음 듣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듣고도 잘 까먹는 타입이라 온 신경이 타자기를 설명하는 사장님 손 밖에 보이질 않았다. 다행히도 중간에 혼자 단어를 어떻게 치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면 친절히 알려주셨고 작업실에 머무는 동안 내 뒤에 있는 책도 읽어도 된다며 따듯한 홍차도 한잔 내주셨다.

생각보다 타자기에 글자를 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받침이 제 위치에 오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다. 예를 들면, 자음과 받침의 위치가 바뀌는 실수인데 아마 타자기 한 번도 안 쳐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싶을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던 2벌식 타자기로 만약 ‘필기’라는 글자를 친다고 하면, ‘ㅍ’ 자음을 누르고 ‘ㅣ’라는 모음이 오기 전에 ‘받침’이라는 자판을 누른 다음 ‘ㄹ’을 쳐야만 온전한 ‘필’ 자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받침이 있는 글자를 누를 땐, 아무 생각 없이 모음을 바로 누르려 하지 말고 한번 더 생각해야만 했다.

늘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져 있던 나이기에 아날로그 향기를 물씬 풍기는 타자기 기능을 바로 습득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나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한 세대라서 빠르게 습득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글씨를 고쳐쓸 수 없어서 종이에 잉크로 꾹 남겨진 틀린 글자를 보고 ‘아 또 틀렸어’라는 생각에 바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나중에 고쳐 쓸 수 없기에 다시 문장을 쓰는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온 신경을 타자기에 쏟으니 문장 한 줄을 완성하는 게 이리도 개운하고 즐거울 줄이야!’

타자기를 누를 때 나는 “탁탁탁” 소리. 내가 뭔가 열심히 쓰고 있다고 대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조용한 공간 속에 타자기 누르는 소리만 한 가득 매워졌다. 적당한 압력을 줘야만 잉크가 종이에 묻어 나왔다. 너무 약하게 해도 글자가 흐릿하게 찍히고 너무 세게 누르면 자판이 고장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민한 친구지만, 종이에 찍히는 글자들을 볼 때마다 글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같은 문장을 쓰고 있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타자기로 쓴 문장들 중에 봉투에 넣고 싶은 부분을 사장님께 드리면 예쁜 실링 왁스로 곱게 마무리를 해주신다. 매번 봐도 신기한 실링 왁스, 마무리까지 아날로그다. 잠시 현재를 벗어나 과거에 잠시 다녀온 듯한 이 공간에서 문을 나서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후끈후끈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종달리에 또 가고 싶은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괜스레 행복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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