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간호사의 평범한 하루
서울 소재 중형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6년 차 간호사의 하루를 취재한 결과물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작성했음을 밝혀두며, 제보자 보호를 위해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아니, 수쌤한테 인사를 했는데 뭐라는 줄 알아요?"
병동의 고요함은 분주함의 전주곡이다. 이 고요한 적막을 깨고 들어온 건 후배 한 명. 만삭에 가까워 오는 후배는 숨 돌릴 새도 없이 스테이션에 목도리를 둘둘 풀어 탁 던져놓고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후배의 말인즉슨,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수간호사가 인사를 받지 않더란다. 가까이 가서 재차 인사를 했더니 돌아온 말.
"어? 생전 안 하던 화장을 하니까 못 알아봤잖아. 왜 이렇게 진해, 화장이?"
눈두덩이에 곱게 자리한 갈색빛 화장. 그라데이션까지 아주 잘 됐다. 어김없이 예쁘다. 제 몫을 다해내는 후배를 예뻐해도 모자랄 판에 수쌤은 가끔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저런 반응이다. 내가 서른이 됐을 때도 어김없이 고나리자였다. "00쌤 이제 서른이야? 어휴. 계란 한 판이네! 얼른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지. 노처녀 히스테리 부리지 말고!"
30살 어택에 고작 나온 말이 “아, 제가 알아서 할게요"였다. 스프라이트 샤워를 한 사발 끼얹었어야 했는데! 얼평, 몸매평, 환자들의 여성비하는 이제 단련이 됐다 싶었지만 나이 공격은 처음인지라 적응이 안 된다. 5년 전에야 신입 버프가 있어서 무슨 공격이 들어와도 “아, 죄송합니다!”로 넘기며 살았다지만 지금 짬밥이 몇 년인데. 자기 먼저 좀 해달라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환자도 상대할 줄 알게 됐고, 선임들이 말도 안 되는 똥을 싸 두면 어김없이 되받아치는 스킬도 늘었다.
그럼에도 신입 시절 신나게 태움 당한 뒤 남은 흉터는 아직도 욱신거린다. 태움의 주역이었던 선임을 결혼식장에서 마주치자마자 몸에 힘이 쫙 풀렸을 정도다. 말로 쥐어 터지는 인신공격의 향연 속에서 뭐라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던 그야말로 오지고 지릴뻔한 시절로 소환되는 느낌이었다. 빈혈이 재발해서 픽 쓰러지길 기도하곤 했고, 자기들끼리 구슬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서러움이 폭발하기도 했던 모욕의 나날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니 엄격하게 배워야 한다지만 그전에 나를 태워 죽일 것 같은 압박감은 너무 과하지 않나?
아득한 과거로 넘어가려던 내 정신을 환자들의 콜이 붙잡아준다. 고요함이 깨지고 신환(신규 환자)이 밀려오고, 입원환자들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60명의 베딩, 간호사는 세 명. 나 그리고 만삭 후배와 신입이다. 한 사람당 20명의 환자를 분주하게 오가며 뭘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수액을 놔야 하는지, 처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살펴야 한다.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동료를 아끼라고들 한다. 그러나 인계를 완료하고 바리바리 챙겨서 베딩을 향하는 둘의 뒷모습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없다. 오르는 열과 피어오르는 기침을 항생제로 욱여넣고, 이 열악한 현실에 등 떠밀려 가는 간호사들에겐 감정조차 사치가 된 지 오래다.
그래, 이젠 애잔함마저 잊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머리는 장식이야?"
신입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꼬리뼈에 금이 간 신입은 침상 4주 진단에도 불구하고 3일 만에 복귀한 터였다. 아프다고 울어봤자 엄살이라 욕먹을 판에 신입이 기댈 곳은 없다. 잘한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못하면 기필코 티가 나는 곳이 병동이다. 셋 중 가장 고참인 나는 불호령에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신입을 흘끗 보았다. 축 쳐진 신입의 어깨만큼이나 불룩한 앞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신입은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노트를 앞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한 번에 암기가 안 되니 해야 할 것들을 빼곡히 적는 거다. 처음엔 노트에 적기도 하고, 외우기도 할 거라 생각했던 나는 노트를 펼칠 시간조차 없다는 걸 깨닫곤 손을 썼다. 적을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 손바닥부터 손등이며 순식간에 까매졌다. 알콜 젤로 몇 번 문지르면 싹 지워져서 다시 묻다 혼난 적도 많고. 이 어리바리하고 혼란스러웠던 시절은 5년 전 수첩 속에 적혀있기도 하다.
"CAG보내고 CT라인 세 명 잡고 ABGA처리하고 인슐린 커버하고 인젝 믹스하고 CSR까지 한 시간 안에"
한 시간 안에 환자를 검사실로 보내고, 주사액을 넣고, 어딜 가서 뭘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다. 6년 차인데 그때랑은 좀 다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니다. 일이 숙련됐으니 한 시간 안에 할 수는 있겠지. 문제는 신입 때와 업무 강도가 비슷하다는 거다. 욕먹어가면서 어설프게 ‘많이’ 하느냐, 일을 빠릿빠릿하게 ‘많이’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오죽하면 캐나다로 이민 가자는 얘기가 나올까. 잠깐 알아보니 캐나다는 근무시간 보장은 물론 일한 만큼 급여도 넉넉히 준단다. 당장 친구, 부모를 등지고 떠날 수가 없어서 캐나다 드림을 접었지만 근무 환경만 보면 떠나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간호사 한 사람당 평균 8.8명을 케어한다는데 내가 오늘 맡은 환자는 그 두 배가 넘지 않나.
병원은 인력 충원하겠다는 말을 밥 먹듯 해대면서도 여전히 20명이 해야 할 일을 10명이 해내길 바라고 있다. 병원만 모를 뿐 의료사고가 안 나는 게 용하다는 사실을 간호사들은 모두 알고 있다. 허리 펴고 한숨 돌릴 시간만 있어도 이런 얘긴 안 한다. 아끼던 동기와 선임들이 더 이상 일을 못 하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갈 때도 나는 말릴 수 없었다. 임신한 후배조차 배려해줄 수 없는 현실에서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의료사고 없이 그저 퇴근이나 제 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그저 ‘운’과 ‘신'이다.
병실 하나를 돌고 나오면서 함께 일했던 간호사들을 생각했다. 밥을 10분 만에 마시는 짧은 찰나에도 많은 일이 일어나곤 했다. 나이트 근무가 잡힌 날엔 텀블러에 믹스 커피 네다섯 개를 털어 넣어주던 동기도 있었고, 목 디스크가 심한 나를 위해 이곳저곳을 주물러주던 후배도 있었다. 신입 시절에는 회식하다 춤 좀 춰보란 이야기에 열 받아서 쓰러진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암!
“쌤. 이것 좀 해주고 가. 어떻게 나이트번이 다 하니?”
와장창. 퇴근하려는 사람 붙잡고 일 좀 더 하다 가라니. 수쌤의 성화에 무려 1시간을 더 근무하고 말았다. 내가 미쳤다. 역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 화장실 한 번을 안 간 게 생각나서 로비 화장실로 들어가면서도 같은 말만 미친 듯이 반복했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암. 엉망이 된 몰골을 수습할 시간도 아까워 찬 바람 속으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