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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듀이 Feb 11. 2021

9살, 컴퓨터 학원의 어느 풍경

키보드에 대하여

9살때, 486컴퓨터 스무대 정도가 있는 작은 컴퓨터학원에서 한컴타자를 시작했다. 어린이가 컴퓨터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던 시절이라 피아노 연습하고 콩나물 채우듯, 한컴타자도 낱말, 문장, 긴글연습만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오만 키보드를 다 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컴퓨터와 키보드는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라, 늦게 오면 지금 표현으로 타건감이 제로인 키보드를 써야했다. 예나지금이나 딸깍거리는 맛이 있는 키보드를 좋아했는데 써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다른 학원이라도 들렀다치면 어김없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밋밋한 키보드를 써야했다. 물론 속도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이게 다 키보드탓이라며!

얄궂은 운명은 타자경진대회인가 뭐시긴가에서도 이어졌다. 탄식이 나오는 키보드를 만나 제 속도를 내지못하자 그만 풀이 죽었고, 그대로 망해버렸다. 평균 속도도 못내고 광탈!

사실 키보드는 다 핑계였고, 실력이 부족했을뿐이다 얘야!


이젠 내 자신에게도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어른이 되었다. 이젠 컴퓨터가 구려도 할 일은 한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시절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 고르지 않아도 마음놓고 쓸 수 있는 키보드가 갖고 싶어졌다. 확실한 위안이 되는, 이백오십프로 맘에 드는게 필요했다. 일주일을 고민하다 레오폴드에서 새로 출시한 블루투스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레오폴드 FC660M PD BT 갈축


이 키보드가 그것일지는 모르지만 휴일에도 이렇게 꺼내서 두드려보는걸 보니 비교적 흡족한 모양이다. 근데 타건감 나쁜 키보드일지라도 빨리 치기만하면 됐던 시절이 훠얼씬 행복했다. 속도내기보다 좋은 글 쓰는게 이천배는 힘드니까. 키보드 탓은 절대 할 수 없는 온전한 내 몫의 일들이 어깨위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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