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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Apr 26. 2023

이별에는 항상 소리가 없고

손톱자국만 남기고 떠난 내사랑아

유심히 책을 보던 부드럽지만 약간은 날카로운 눈빛이랄지, 책장을 넘기는 유독 가늘고 긴 손가락이랄지, 항상 그런 것들이 나의 미련으로 남았다. 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절대 표지를 책 속에 껴놓지 않던 습관. 글을 쓰는 네가 성에 차지 않는 스스로의 글에 탄식하며 남의 이야기보다는 그 문체에 집중하며 읽고 읽고 또 읽던 그런 나날들. 너는 늘상 책에서 위로같은 감정이 아닌 문체와 같은 이성을 찾으려 했던 걸까.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이었다. 다정하다 싶은 날의 끝에는 어김없이 화를 냈고, 뾰족하다 싶은 날의 끝에는 서로 등 돌리고 자도 새벽에 조심스레 등을 감싸 안는 너였다. 타고나길 예민한 성정이 널 그렇게 만든 걸까, 그도 아니면 그저 세상이 사포같아서 너를 갈아 놓은 걸까.



회피형과의 연애는 그다지 권할 것이 못 된다. 그럼에도 너를 만났던 이유는 네가 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늘여가며 떠나길 재촉하는 모습이나 자기가 잘못해놓고 되려 탓을 하며 상처를 주던 모습이나 스스로의 화를 참지 못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던 모습 때문이다. 



떠나길 재촉하던 모습은 마치 제발 남아달라는 것처럼 보였고, 상처를 주던 말과 다르게 표정은 곧 울 것 같았으며, 바깥으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네 손바닥에 남아있던 깊게 패인 손톱 자국. 그런 것들이 기어이 내 눈과 코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사랑으로 누군가를 다 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큰 오만이었던가. 누군가의 상처를 사랑으로 완전히 감싸줄 수 있을 거라던 믿음이 얼마나 얄팍했는가. 말은 가볍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결국 너를 떠나던 날에 너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 더는 너의 우울을 견딜 수 없다면서. 그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난 내가 소중하다면서. 분명 한 치의 거짓이 없는데, 나를 소중하게 여기려던 것뿐인데, 이별을 고하던 그 말이 잔인하고 무거워서 난 자꾸 주저앉았다.



그래. 이제와서 마치 미련이 채 가시지 않은 사람 마냥 이런 말을 늘여놓는 것이 너에게는 상처겠지. 너와 나만 알던 그 모든 상처와 감정을 이렇게 멋대로 드러내다니. 그렇지만 이젠 질책할 너도, 화내며 손톱으로 또 스스로 상처를 낼 네가 없다. 



넌 항상 말했지. 어떤 지독한 의미로든 세상에 누구 한 명은 절대 자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무조건 너가 나보다 더 늦게 죽으라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더 일찍 죽어버리고 싶다고. 



자기 상처에 먹혀버린 널 생각하면 아직도 아프고 앞으로도 많이 아플 것 같다. 스스로를 뜯어내던 손톱이 내 가슴을 헤집는 것 마냥 아프다. 왜 그럴 수 밖에 없던건지 아무리 물어도 이젠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그렇게 외로움을 탔으면서, 수영도 못하면서 왜 혼자 바다에 들어갈 생각을 했는지. 추운 걸 제일 싫어했으면서 왜 하필 한겨울의 바다를 정한 건지. 그런 것들이 이 매서운 눈바람보다 날 더 춥게, 웅크리게 만든다. 마치 사라진 널 끌어안는 모양처럼 둥글게 둥글게.



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지 않았지만 이젠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너는 나를 사랑했다. 스스로는 회피했겠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에는 더 꾸밀 단어들이 필요하지 않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에 얄팍한 감정을 더하고 싶지 않다. 네가 들으면 또 버럭 화낼 소리어도 어쩔 수 없다. 네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 조막만한 머리로 차마 말로는 절대 못하던 것들을 글로 써낸 걸 봤으니까. 글에도 화내는 기운이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웃어버렸다. 이게 저주야 사랑이야. 



응. 사랑이지. 

명백하게 사랑이지.


그렇지 않고선 너의 그 수많은 책들 안에 책갈피로 쓰인 내 폴라로이드가 설명이 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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