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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Oct 13. 2022

불안에 관한 단상

인간은 영원히 불안해야만 할까

팀 버튼은 말했다.


"한 개인의 성격은 자신이 지내온 어린 시절의 결과이며,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하나의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계속 재탕하며 평생을 보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고, 예술가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결국 마지막에는 똑같은 집착을 조금 다른 각도로 접근한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꽤 화나는 일이다. 누구나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풀어야 할 저주인 셈이다."


내가 특출나게 성격이 모나다거나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에 조금 기복이 있다. 이 성격이 지나온 세월의 결과임은 자명하다. 나의 반복되는 아이디어란 '불안'이다. 불안과 우울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으로, 가끔 심한 불안에 빠지면 우울 속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곤 한다(후술하겠다). 그런 현상과는 별개로, 평생을 이렇게 지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말은 꽤나 슬프다. 그런 스스로를 악쓰며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이런저런 편린들마저도 나를 이루는 구성체들이고, 정말 가끔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쉬운 사람이다. 정말 쉽게 기뻐하고 쉽게 불안해한다. 요근래는 다시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 남들에게 나는 쉬운 사람이지만, 도무지 나는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는 나를 어찌나 쉽게 판단하는지... 도사들이 따로 없다) 이게 도통 슬픈 건지, 우울한 건지, 화나는 건지를 점점 구분하기가 힘들다. 구분할 수가 없어서 생각한다. 너는 대체 무엇을 바라니. 근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다. 구체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럼 대략적으로는 무엇을 바라니. 딱 하나다.


불안해하지 않는 것.


평생을 불안과 싸우며 살아왔다. 사람이 좋아서 함께 잘 어울리다가도 종종 마음(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무튼 꽤나 중요한 것 같은 무언가)이 철렁하고 저 멀리 바닥까지 끝도 모르게 떨어진다. 그럴 때면 그 마음을 다시 건져올리려 바닥으로 내려간다. 내려가고, 내려가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도대체가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왜 이런 종류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지. 어떻게 마음을 건져내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하며 올라온다. 그렇게 제 자리에 두고 나면 진이 다 빠진다. 정말 단어 그대로 힘이 드는 과정이다. 하도 많이 반복한 과정은 이제는 우습지도 않다. 그럼에도 언제나 슬픈 것은 사실이다. 우습지 않은 것과 슬픈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생각보다 나는 눈물이 없다. 사소하거나 기쁜 일에는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꽤나 가식적이다. 문제는 이러다보니 울고 싶을 때도 울 수가 없다. 초진하는 정신과에서는 항상 심리 검사(?)를 한다. 검사지에 항상 있는 문항이 있다.


"얼마나 자주 우냐?" (대충 이런 의미의 질문)

"거의 없다, 체크" (나는 너무 우울하지만)


한번 잔뜩 슬퍼하며 울고 훌훌 털어버리고 싶지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쥐어짜내는 것도 결국 힘이 드는 일이다. 어쩌다 울고 나면 머리가 아픈 것도 싫다. 어릴 때부터 울면 지는 것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저 문장을 지고 살아온 세월이 길다. 그래서 더 울기가 힘든 걸까.


불안이 과하다. 마음이 지나치게 요동쳐서 멀미가 날 지경이다. 단순히 정신적인 현상에 그친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최근에 다시 병원에 가기 시작했다. 상담도 받고, 약도 받고,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계속 숨쉬기가 힘들고 식은 땀이 날 때면 크게 숨을 쉬고 열 까지 천천히 세어보라고 했다. 그냥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얼마나 힘든 사람이 많은데 고작 내가 공황을 겪는다는 것이 꽤나 수치스러웠다. 정말이지. 수치였다. 내 모든 불안의 원인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라고 했다. 분리하되, 계속 도와야 한다고 했다. 가족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사실 선생님한테 말하고 싶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할 수 없던 말이 있다.

(그도 그럴게 이미 결론을 정하고 말씀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 저는 그 가족이라는 단어가 정말 잔인하게 느껴져요. 정말 지독하게 잔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분리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사랑해서 더 힘들어요. 사랑해서 차마 상처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꾸 스스로 상처내는 것 같아요. 그렇게 스스로를 상처내면 또 너무 슬프고 불안해서 자책해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들이 미워요. 근데 그 사람들마저 없으면 대체 누가 날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해줘요. 저는 아직도 떨치지 못하는 그 날에서 무한한 죄책감을 느껴요. 그러니까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생각했다. 대체 이걸 또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하도 많이 생각하고 말해서 이제는 외워버린 레퍼토리. 하지만 당신들도 알다시피 어떤 말은 발화하는 시점에서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너무 차갑게 나를 얼리곤 한다. 부정적인 과거, 그에 파생한 무수한 감정을 말하는 것이 힘든 이유이다.


정말이지 지겨웠다. 그냥 딱 일곱 글자만 말하고 싶었다.


"저 좀 살려주세요"


혹시 당신은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빌어본 경험이 있는가 묻고 싶다. 나는 많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고, 현실의 누군가에게 빌고,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빌었다. 어느 때고 답을 받지는 못했다. 아마 그래서 빈다고 표현하는 거겠지. 일방적으로 비는 것은 참 처참하다. 그럴 때면 한없이 작아지니까. 응원이 응원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지. 왜냐면 그것 마저도 나에 대한 평가 같을 때가 있거든.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나약하거나 지독하거나 여타 여러 종류의 사람으로 판단한다. 왜 나는 누군가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까.


그래서 약을 먹는다. 감정 조절도 약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근데 요새는 잘 모르겠다). 참 신기하다. 요동치는 마음 속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다. 잠도 조금씩 더 자고 있다. 식욕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저번주까지도 먹은걸 자꾸 토해서 목이 아팠다. 계속 졸리고 추웠다. 그냥 다시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겠거니 생각한다. 나는 사랑했던 사람이 해줬던 말을 믿는다. 나의 중심에 단단히 동여매어 그 말에 기대곤 한다.


오지 않을 날들도 결국에는 왔다. 그렇기에 당신의 행복도 결국에는 오고야 만다.


오늘 같은 날에는 사랑하는 시인의 다정한 언어도 소리내어 읽곤 한다.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한 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 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워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헐벗음 속에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발음해야만 한다.


아직 삶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항상 실체없는 것들이 나의 전부이다. 누군가의 다정한 언어와 누군가의 다정한 말에 기대어 흔들림을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이 불안은 잦아들고 평온해지겠지. 절대적인 명제는 사람의 삶에 존재하지 않지만서도, 그냥 그럴 것이라 믿고 싶은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불안도 끌어안고 살다보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언가를 온전히 마주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여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너무 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 나의 무기력이나 우울 혹은 불안마저도 사랑으로 코팅해주는 사람들. 하나하나 다 표현하진 못해도 고마울 뿐이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나도 계속 노력할테니까 그저 나를 포기하지 말아주길.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었지만, 인내하고 나아간 곳에는 그 방향과 상관없이 항상 삶이 있었고. 아마 팀 버튼이 한 잔인한 말처럼 나는 평생 내게 걸린 저주를 끌어안고 나아가야 할 팔자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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