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랑 동생이랑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 차 잡아타고 다녔던 거 기억나? 진짜 큰일 안 난 게 천만다행이야”
최근 육아를 도와주러 집에 온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이 말에 “그렇지. 그렇지” 하고 동의하면서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미안했던 것 같다. 당시 우울증과 삼남매를 키우느라 하루를 겨우 견뎌냈던 엄마는 우리의 하굣길까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작년 3월 육아휴직을 하고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바닥을 닦을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장난감을 정리할 때 내 유년시절 기억들이 송곳처럼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회사 다닐 때는 없었던 일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유년시절이 자꾸 떠오른 것 같다.
나는 강남에서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포천의 한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갔다. 강남에서는 모든 게 가까웠다. 집과 학교까지는 15분 정도 걸렸고, 도서관과 편의시설 등 모든 게 지척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학교와 집까지 걸어서 1시간 30분이 걸렸다.
학교가 끝나면 남동생의 손을 잡고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무 그늘도 없는 땡볕을 걷는데 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근처에 슈퍼마켓도 없어 더위를 달랠 방법도 없었다. 길을 가다 이름 모를 꽃을 하나 꺾어 들고 그저 걸었다.
그렇게 작은 길에서 도로길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우리 옆으로 차 한 대가 섰다.
“얘들아 어디까지 가니? 아저씨가 태워줄게”
우리는 우물쭈물하다 차를 얻어 탔다. 정수리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차가 달리자 열어놓은 창문으로 ‘파아아-‘ 하고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뜨겁게 달궈진 머리를 식혔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향해 “감사합니다!”라고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집에 들어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마도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하굣길에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도로를 걷다 지칠 때면, 손을 뻗어 지나가는 차를 잡아탔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버스도 없고, 그저 걷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11살, 10살 꼬마들에게는 집에 가는 꽤나 만족스러운 방법이었다.
매번 얻어 탄 건 아니다. 간혹 가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었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옆으로 검은색 세단이 섰다. 선글라스를 쓴 40대 남성이 “얘들아 어디까지 가니? 태워줄게”라고 말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희 집 거의 다 왔어요.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남성은 계속해서 “얘들아 빨리 타”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서둘러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뛰듯이 집으로 걸었다. 그 차는 천천히 우리 옆을 따라오다 집에 들어가는 걸 보자마자 바로 쌩하니 가버렸다.
이런 경험을 한 뒤에 히치하이킹이 두려워 친구들과 삼삼오오 함께 하교를 하기도 했다. 우리 집이 제일 멀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하나둘씩 집에 들어가고도 30분을 더 걸어서야 나와 남동생은 집에 도착했다. 언덕을 넘고 저수지를 지나 또 언덕을 넘는 꽤 고달픈 시간이었다.
하지만 몇 달 뒤 우리는 시내에 있는 학원을 다니면서 등하굣길이 편해졌다. 시내에 있는 학원의 학원차가 아침에는 집으로 데리러 오고, 학교가 끝난 후 학원에서 집까지 데려다줬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히치하이킹이라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요즘같이 흉흉한 뉴스가 나올 때면 “어휴 그때 너무 위험했어”라는 혼잣말이 나온다. ‘너무 먼 거리였는데… 부모님은 왜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하는 야속한 마음도 든다. 아기를 키우다 보니 더 그렇다.
아무튼, 그때는 어려서 힘든 게 힘든 줄 몰랐다. 다시 돌아가라면 절대 못 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