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쉼표
악보에서, 쉼을 나타내는 기호.
나는 MBTI의 계획형인 J인데, 사실 머릿속에는 생각만 가득하고 실천은 안 하는 J 같다.
아마 내 인생을 영화 시나리오로 만들었다면 ( ) 소괄호가 상당히 많을 것이다.
#1. 주인공의 집
이른 아침, 본인의 침대에 누워서 멍 때리며 생각을 하고 있는 주인공.
주인공: (운동하고, 시장조사하고, 외국어도 공부하고, 건강식으로 먹고, 자격증도 준비하고, 디자인도 공부하고, 외주 받은 것도 하고, 지인들과 모임도 가지고, 글도 쓰고, 사진도 배우고, 아이고 집청소도 해야 하는데) 우선 SNS에 올라온 숏츠나 볼까?
감독의 시선에서 저 주인공(나)을 보았다면 답답함을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무당도 제 앞가림을 못한다는데, 일반인이 본인의 인생을 정확히 예상하면서 살 수 있을까?
올해 초에 우연히 타로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나의 타로카드 중 첫 번째 결과는 “아프네요.”였다. 그 당시에는 그저 가볍게 지나갔었다. 약 2년 동안 5시 반 기상-11시 전 취침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사람 간에 스트레스도 없었고, 무엇보다 술/담배/인스턴트도 하지 않았으며 퇴근 후에는 주 3~4회는 꾸준하게 운동도 했으니 말이다.
타로를 본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퇴근 후 회사 동료들과 근처 한강공원에서 평화로운 피크닉을 즐기고 우리 집에 초대를 했다. 저녁까지 잘 놀고 잠을 자던 중에 갑작스러운 우측 아랫배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7년 전에 겪은 게실염 (대장에 작은 공간이 생겨서 염증이 발생하는 것) 이 재발한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새벽동안 끙끙거리다가 손님들 몰래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였고, 입원키트를 챙겨 응급실에 제 발로 갔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적중했다.
#단톡방
나 : 다들 놀라지 말아요, 현재 집주인 게실염으로 인해 응급실 옴. 입원 중입니다.
손님들 :???
나 :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손님들 입장에서는 어제까지 잘 놀던 집주인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집주인이) 있었는데? 아니 없어요.
타로집, 상당히 용하다.
가볍게 지나갈 것 같았던 3일간의 입원생활.
퇴원 후 회사출근을 하면서도 통증이 남아있었지만 약을 먹으며 버텼다. 그렇게 일주일의 회사생활을 하던 중, 다시 입원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리고 또 입원키트를 챙겨 제 발로 응급실을 찾아갔다.
외래진료와 응급실, 이틀연속의 방문에 의사 선생님은 낫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통증이라며, 내가 예민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검사결과, 염증이 더 심해져 있었다.
나 : 제가 응급실에 오길 잘한 건가요?
의사 : 네, 잘 오셨어요. 제가 잘못 봤네요. 염증이 더 퍼져있네요.
나: 원인은 뭔가요? 제 습관이 잘못된 걸까요?
의사 : 습관은 중요치 않아요. 걸리는 건 복불복입니다.
허무했다. 아픈 게 복불복이라니.
일주일의 입원기간.
그중 5일 동안 물포함 금식과 항생제 치료를 했지만 염증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 “장 절제”라는 최악의 수술직전 상황까지 갔다. 그 와중에 병원에서 가위도 눌리고, 주변 분위기로 인해 생과 사를 간접적으로 느끼다 보니 생각한 점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새벽 기상과 지옥철, 사무실에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 건가. 혹시 미래에 대한 무의식의 스트레스 때문인 걸까. 버는 것보다 병원비가 더 많이 나가네, 또 아프면 어쩌지. 우선 얼른 나아서 회사 출근하자. 공백이 너무 길었어. 동료들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입원기간을 정기휴가로 대체하고, 퇴원 후 기력회복을 위해 하루 더 연차를 썼다.
다음날 오랜만에 회사 출근을 했고
아뿔싸, 또 통증이 시작되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