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은 바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스무살 무렵까지 저는 바다가 수평선인줄만 알았습니다. 동해바다의 짙은 코발트 블루를 좋아했고, 수평선 너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해질 무렵의 서해바다를 좋아했고, 에메랄드 그린의 제주도 북쪽 함덕해변도 좋아했습니다. 그 시절 저에게 바다는 곧 수평선이었습니다. 서울에 살아 한강을 자주 보던 저에게 바다나 강이나 물살의 너울거림은 같았지만, 수평선 만큼은 바다에서만 볼 수 있었으니까요.
바다에 대한 제 인식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스무살이 넘어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여행을 꽤나 좋아하던 편이어서,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배낭여행을 했는데요. 많은 나라들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제법 여러 나라들을 갔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이 막 끝난 당시 중국을 갔었고, 대학생 때는 인도를 두 번, 미국을 두 번, 쿠바와 멕시코를 한 번 다녀왔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이나 싱가폴,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등을 갔으니 적게 간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다양한 자연환경과도 마주하게 되는데요. 히말라야의 판공초(호수)나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이크 타호는 호수지만 수평선이 보이고 파도도 쳤습니다. 으레 바다란 백사장과 파도와 수평선인줄만 알았던 저는 서서히 바다를 새롭게 정의해야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작은 깨달음을 얻었던 건, 샌디에고에 3주정도 살면서 매일같이 바다를 보게된 뒤였습니다. 미국 서부의 끝자락 캘리포니아, 그리고 그 최남단의 도시 샌디에고. 샌디에고에서는 어디서나 걸어서 몇분이면 바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태평양을요.
태평양은 광활했습니다. 아니, 광활했을까요? 사실 레이크 타호나 서해바다와 태평양이 어떻게 달랐을까요? 서해바다도 바다인데, 왜 태평양이라는 단어는 이토록 가슴 먹먹한 울림을 주는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이 태평양을 매일같이 보다 보니 문득문득 제 머릿 속에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고민 끝에 도달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바다가 바다인 것은, 갈매기나 파도나, 소금물이나, 수평선 때문이 아닐수도 있겠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바다가 바다인 것은, 가도 가도 육지의 실마리 조차 나오지 않는 광활함을 우리가 상상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요. 똑같은 수평선이지만, 우리는 압니다. 레이크 타호는 호수이기에 그 수평선도 사실은 언젠가 육지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와, 호수가 이렇게나 크네' 정도에 감동은 머물고 맙니다. 태평양은 조금 다릅니다. 역시, 지구 반대편은 보이지 않기에 사실 태평양에서 보이는 수평선이 레이크 타호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죠. 태평양이 태평양인건 가도가도 끝이 없기 때문이란걸 배워서, 인식해서 알고 있습니다.
영종도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본들, 중국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강릉에서 바다를 바라본들, 일본이 보이지도 않고요. 하지만 태평양을 봤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동해바다도 서해바다도 이전만큼 광활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바다가 좁아지진 않았을 테니까, 동해바다, 서해바다, 태평양에 대한 제 인식의 차이가 그런 답답함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어쩌면 호수와 바다, 강과 바다의 차이는 관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노를 저어 한참을 가도, 대륙은 커녕 섬 하나 마주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 광활함. 그리고 그 광활함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을 통해 습득된 태평양의 광활함에 대한 인식. 이것이 어쩌면 바다의 본질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