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46

by 노루

고요하고 어둡고, 춥고 사람을 웅크리게 만드는 긴 겨울을 보내다 보면 그것이 온다. 새해. 조용한 핸드폰에 생경하고 새삼스러운 연락이 드문드문 찍히는 시간. 무심코 물건을 사고 나가며 문을 밀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정한 인사가 들려 당황하게 되는 발걸음. 그 덕에 무표정이었던 나는 유난히 삭막하고 무미건조했던 것처럼 느껴져 괜히 머쓱해지는 때가 몇 번이고 쌓이면 그때야 실감한다. 아, 새해가 왔다.


나는 새로운 것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적응이 피로하고 시작이 무섭다. 그렇지만 새해는 아주 크고 대단한 새것이지만 그리 거창한 관계와 몸가짐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작년과 또옥같은 일상을 지내고, 그저 말로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마디씩을 거들고, 뭔가 맛있는 것을 먹거나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도 '새해 첫 양말, 새해 첫 귤, 새해 첫 청소' 같은 새삼스러운 생각들을 한 번씩 덧붙여보면 괜히 설레고 애정이 솟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흑백사진 같던 세상은 잠깐씩 따뜻한 생기기 돈다. 그리고 또 자고 일어나는 반복을 그냥 그대로 지내면 그만이다. 새해는 그런 것들을 내게 준다.


새 달력이 생기면 넘겨보며 한 해의 공휴일을 확인하고 가족들의 생일이 무슨 요일인지 표시한다. 이쯤 나는 뭘 하고 있을지 상상하며 또 올해의 네 계절을 그려본다. 아직 새 달력을 받지 못했다. 종이 달력 찾기가 힘들어지면 이 작업은 휴대폰 캘린더로 대신한다. 상상 속의 일상은 좋기만 해서 나는 괜히 희망차고 마음이 부푼다. 2026년엔 좀 더 점잖고 차분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살은 조금 빼고 싶다. 제철 나물을 많이 먹어보자.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 밥을 먹어볼까. 남편이 코를 골아도 조금은 더 옆에 누워있어 볼까. 종이에 적기는 다소 사사로운 새해 목표들은 휴대폰 메모장 같은 데다 쓴다. 내 새해는 그렇게 채워진다.


깨끗한 새 종이 같은 새해는 금방 그 '새'가 잊힐 테지만 그것이 생생한 그 며칠이라도 그렇게 싱그러운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 만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새해의 건강이나 안녕을 당부하면 내 스스로가 퍽 따뜻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새해에는 힘들지 말고, 새해에는 건강, 올해는 더 많이 웃고, 다 잘될 거야, 바라는 일 모두, 말을 고르기는 언제나 어려워서 비슷비슷한 인사를 몇 번이나 썼다 지우고는 결국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흔한 인사로 마무리하게 되는 요즘이다.


복이라니, 얼마나 기대기 좋은 말인가. 복. 그래, 복 정도면 될 것 같다. 큰 기적이나 성취보다는 그저 조금의 복. 건강기능식품 포장에 적힌 '도움을 줄 수 있음'처럼 책임지지 않는 느낌이라도 좋다. 내가 응원하는 마음에 비해 할 수 있는 건 대체로 작으니까. 정말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그저 정성적이고 추상적인, 그래도 왠지 기분 좋은 행운과 복이 따라주기를 바라게 되는 새해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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