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출간 후 작가들이 말하는 글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글태기인가.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을 켜보지만 한동안 깜박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애꿎은 마우스만 만지작거리고 쓸데없이 안경태만 고쳐 잡는다. 밀린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는 기분이랄까.
머리는 쓰라고 하고 손은 말을 듣지 않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생애 첫 출간으로 글쓰기가 주는 유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비록 눈 떠보니 다른 세상이 되었다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상이 변하긴 변했다.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부터가 달라졌다. 가족과 지인들이 어떻게 책을 썼냐며 존경의 눈빛을 담아 "작가님"이라고 치켜세운다.
심지어 북토크까지 치렀다. 요즘은 두 번째 책을 기획하며 한 권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글을 쓰고 책을 내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일들이다. 그런데도 요 며칠 글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어렵게 들인 글쓰기 습관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쁜 습관이 잠식하며 어렵게 장착한 글쓰기 습관을 밀어냈다. 지금까지 아침 설거지를 마친 뒤 이부자리와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글을 썼다. 에이바우트에 도착하면 오전 10시. 점심시간까지는 오롯이 글쓰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5개월 동안 글쓰기 습관이 자리 잡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된 8월부터 아이들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 글쓰기 루틴이 깨지고 말았다. 글쓰기에 할애했던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야 했고 글쓰기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만사가 귀찮아졌다. 굳이... 뭐 하려고...
지나고 보니 글을쓰는시간을 조금만 조정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육퇴 후에 글을 쓸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저녁에는 피곤해서 글 쓰기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거실 소파에 누워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맥주가 땡기고 드라마만 볼뿐이다.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손을 묶고 머리를 틀에 가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글을 쓰다 말고 문장을 고치고 다듬는 것을 발견했다. 초고는 쓰레기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까지 앗아갔다. 몇 글자 끄적거리다 말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끝이 안 보이는 글럼프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황준연 저자는 [평범한 직장인이 어떻게 1년 만에 2권이 책을 썼을까]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20매의 원고를 쓴다며 자신도 매일 4시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과 분량을 지키는 것보다 매일매일 글을 쓰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고 싶은 변화가 크건 작건 출발점은 아주 작은 행동에서 시작한다.
[습관의 디테일] 책에서 "포스트잇 한 장의 기적" 예화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글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이겠구나 싶었다. 포스트잇에 하루에 한 문장 쓰기, 필사하기, 하루 15분 글쓰기, 쓰고 싶은 주제와 내용 키워드로 적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들지 않을까.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과감히 쓰지 말아야 한다. 억지로 글을 쓰려고 하다 보면 글쓰기 자체에 대한 거부감만 들 것이다. 글쓰기에서 벗어나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소진된 것을 재충전할 수 있다.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다시 적기 시작했다. 작은 수첩과 만년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책을 읽고 인상 깊은 한 문장을 필사를 하고 나의 생각을 한 줄 덧붙인다. 신기하게도 빈 수첩을 채울 때마다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수첩에 쓴 내용을 옮겨 적으며 덜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