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고히 세웠던 비혼의 의지가 무너지는 순간은 누군가의 결혼 독촉도, 친한 친구의 청첩장도 아니다. 사랑했던 연인의 결혼 소식이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미련이라는 감정이 톡 하고 튀어나와 온몸을 헤집고 다닐 때, 바로 그때다. 너와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그녀의 자리가 부러웠다. 네가 그녀를 보며 환히 웃더라.
전에 네가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랑은 얼굴만 봐도 좋아죽고, 그 사람 생각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쉴 새 없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설레는 것이라고. 넌 사랑을 찾았을까. 네 옆에서 환히 웃는 그녀는 네 사랑일까.
나는 사랑이 아니라던 네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차가웠다면 화가 날 텐데 그때 너는 슬퍼 보였다. 그래서 괜히 골이 났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너를 떨치려 뙤약볕에서 자전거를 탔다. 요새 제법 건강해졌는지 도림천에서 안양천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이 티셔츠를 흠뻑 적셨다. 뚝뚝 떨어지는 미련이 몸까지 젖어든 기분이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며칠 잠을 통 자지 못했던 데다가 지난 밤에는 네 사진까지 보지 않았던가. 지친 눈을 억지로 감고 하루를 꼬박 잤다. 두어 시간마다 깨던 사람이 열두 시간을 넘게 잘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자도자도 졸린 사람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던 기억이 났다. 깼다가 또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떠오르는 건 너였다. 환장할 것 같았다.
너와의 짧은 연애를 하던 당시, 나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았다. 너와 관련 없는 곳을 가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마다 종종 가던 시화 방조제로 내비게이션을 찍고 무작정 액셀을 밟았다.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 밤 운전을 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올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하나씩 들어서는 도로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오래 전인지 깨달았다. 빛 하나 없이 새까만 바다를 바라보면서 '널 지워야지'라는 생각만 반복했다. 네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계속 너를 떠올렸다.
온몸이 아프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눈도 뻐근하고 온종일 멍하다. 벌써 몇 년 전인데. 한참이 흘렀는데. 나는 왜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는지 모르겠다. 너 없이도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고 착각이었다. 가슴 한 켠에 남은 미련에 갑자기 이렇게 잠겨버릴 줄은 몰랐다.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네가 뭐라고 나는 이렇게 며칠을 앓고 있을까.
너를 만났던 그 짧은 시간. 되돌아보니 가장 나다웠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늘 전전긍긍했다. 네가 나를 나로서 좋아해 주길 바라던 날들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순진하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도 네가 생각하는 사랑을 사랑이라 여겼다. 나는 네 얼굴만 봐도 좋아죽고, 네 생각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설렜던 것 같다. 나는 사랑이었고 너는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