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에서 피어난 인생의 새로운 장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 삶이 마치 천천히 돌아가는 세탁기처럼 느껴지는 걸. 빙글빙글 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아,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노잼 시기'구나.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고, 거리의 사람들은 분주해 보이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다. 마치 시간이 나를 두고 훌쩍 떠나버린 듯한 기분.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회사에 가고, 퇴근 후 스마트폰을 보다 잠드는 일상.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예측 가능한 일상.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30대 후반, 나는 이미 충분히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정 속에서 나는 금세 무기력해지고 있다. 마치 편안한 안락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일어날 힘을 잃어가는 것 같달까.
이 지루함의 늪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시작한 나만의 '노잼 탈출 프로젝트'. 처음엔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뭔가 달라져야 해.'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나는 노트를 꺼내 무작정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 새로운 경험하기
2. 지식 확장하기
3. 창의력 깨우기
이렇게 세 가지. 너무 단순해 보이나? 하지만 때론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다. 나는 이 세 가지를 나만의 '노잼 탈출 비밀 지도'로 삼기로 했다.
첫 번째 미션은 '낯선 것 경험하기'다.
"이 뮤지컬 같이 보러 갈래?" 어느 날 친구가 불쑥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 나 그런 거 별로..."라고 대답했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래!"라고 답했다.
사실 속으론 '뮤지컬이 뭐야, 노래하면서 연기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TV에서 본 적은 있지만, 그저 과장된 연기에 어색한 노래만 들리는 것 같았달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특별한 분위기, 무대의 화려한 세트, 그리고 배우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연기.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아, 이런 게 있었구나. 2시간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었다. 현실의 모든 걱정과 스트레스를 잊고, 무대 위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런 게 있었다니,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살고 있었던 거야?'
그 후로 나는 틈만 나면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려 노력했다. 전에 가보지 않은 동네 골목을 산책하고, 처음 보는 외국 영화를 보고,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나라의 음식을 주문해 봤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즉흥 여행이었다. 어느 주말, 문득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갈 곳도 없고, 준비도 안 됐는데...'라며 포기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무작정 떠났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저 가고 싶은 대로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 낯선 거리를 걷고, 자연에 흠뻑 둘러싸이고, 처음 들어보는 식물과 동물을 마주하며 나는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 마치 어릴 적 소풍 가던 날 아침 같은 기분이랄까. 새로운 경험은 내 일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두 번째 미션은 '새로운 지식 탐험하기'.
온라인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 첫 장을 펼쳤을 때만 해도 '이게 뭐야'싶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고리즘... 낯선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새벽 3시.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들어올 때까지 책을 놓지 못했다.
인간과 기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마치 안개 낀 창문을 닦아내는 것 같았다.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진 기분이랄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어제와 다른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과학, 철학, 역사, 예술... 전에는 관심도 없던 분야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꼈다.
온라인 강의도 들었다. 요리부터 프로그래밍까지,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지식을 쌓아갔다. 특히 프로그래밍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처음엔 그저 영어와 기호의 나열처럼 보이던 것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이렇게 쌓아가는 지식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정보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지식은 내 사고의 폭을 넓혀주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 미션은 '창의력 깨우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어졌다. "야, 나 30대에 피아노 배우면 늦은 거야?"라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너 미쳤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 미친 짓이니까 해보는 거지.
첫 수업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습하는데 손가락이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마치 오래된 장난감을 꺼내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서툴지만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 느낌, 그게 바로 내가 찾던 것이었다.
피아노 외에도 다양한 창의적 활동을 시도해 봤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요리... 결과물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그 과정,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었다.
특히 글쓰기는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처음엔 그저 일기 쓰듯 하루의 일을 적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인 이야기들. 그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일상의 모든 걱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세 달이 지났다. 여전히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무기력하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지도가 생겼다. 노잼의 늪을 건너는 나만의 비밀 지도. 뮤지컬 포스터, 하라리의 책, 그리고 도레미파솔라시도 악보. 이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재미난 곳에 도착해 있겠지.
오늘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이 조금 달라 보였다. 눈빛이 조금 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어쩌면 그냥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는 거니까.
이제 나는 안다. 노잼의 늪은 결국 내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힘 역시 내 안에 있다는 걸.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 그리고 창의적 활동. 이 세 가지가 나를 변화시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앞으로도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무기력할 거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 나에겐 이 지도가 있으니까. 그리고 언제든 새로운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