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은 사람을 얼마나 멀리까지 이끄는가
유학이나 이민, 이직, 이사 등 삶의 공간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결정은 다른 여느 결정들보다 물리적, 정신적 비용이 크기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학에서도 공간모형(spatial model)을 통해 임금, 집값, 학군, 생활환경, 이사비용, 거리 등 수많은 데이터를 때려박고 사람들의 합리적인 이주 결정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이주 역사를 되돌아보면, 내 결정을 이끄는 8할은 감성이었다. 소위 말하는 역마살이 낀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창원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구미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대학을 가며 서울에 정착, 군시절은 대전에서 보내다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 미국 동부로 박사과정 유학을 오기까지. 30여 년간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방 하나 메고 여행하는 인생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일부는 내 결정권 밖의 영역이었다고 해도 서울에 살면서도 세 번을 이사가고 미국에서도 벌써 네 군데 다른 곳에 살아보았으니 이런 노마드적 인생은 분명 내 선택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선택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학창시절 읽었던 몇 권의 책들이 자리잡고 있다.
루이제 린저 [삶의 한 가운데]의 니나, 바르가스 요사 [나쁜 소녀의 짓궃음]의 오틸리타,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골드문트. 세 주인공의 인생은 떠돌아다니는 삶 그 자체였다. 니나는 나치즘이 만연한 유럽에서 안정적인 삶을 거부하고 개인의 주체적인 삶과 반나치즘 투쟁을 위해 여러 도시들을 떠돈다.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은 페루 작은 마을의 소녀 오틸리타는 늘 파리를 꿈꿔왔다. 그녀는 파리에 나타났다 쿠바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프랑스 외교관의 아내가 되었다가, 영국 사업가의 아내가 되었다가, 심지어 일본 야쿠자의 아내가 되기도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청년 골드문트는 사제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우연한 계기로 박차고 나가 정처없는 방랑을 시작한다. 농부의 아내나 기사의 딸들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하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명망 높은 조각가의 제자가 되어 예술을 배우기도 한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있는, 안정과 이성을 상징하는 화자들에 의해 묘사된다. 니나를 평생 사랑해온 의사 슈타인은 바람처럼 사는 니나의 인생을 원망하기도, 동경하기도 하며, 끝내 실존을 찾기 위해 투신한 니나를 존경한다. 40년 간 나쁜 소녀를 짝사랑한 착한 소년 리카르도 역시 끊임없이 버림을 받음에도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오틸리타를 동경한다. 수도원의 절친한 친구였던 나르치스는 존경받는 수도원장이 되었음에도 골드문트가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는 데에 밑거름이 된 골드문트의 퇴폐한 인생과 행적을 존중한다. 화자들의 눈에 이 주인공들은 주어진 속박을 벗어나고 뛰쳐나가 어떤 의미로든 주체성을 찾기 위해 열렬히 생을 살아간 사람들이다.
중2병이 걸린 학창시절의 나는 슈타인이었고, 리카르도였고, 나르치스였다. 자유 그 자체를 사는 니나, 오틸리타, 골드문트를 동경했다. 떠도는 인생이 어쩌면 행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생일지라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가치판단, 규제를 벗어나서 내 인생이 포괄할 수 있는 세상의 스펙트럼을 넓혀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인생의 의미는 행복의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살아가야하는 의미를 찾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를 치르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좋은 아파트에 살기 위해 일하고 투자하는 룰이 확정된 수레바퀴 속에서 이게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떠도는 삶을 동경했고, 이 동경은 내가 유학을 준비하는 데에 본질적인 이유와 동기가 되었다.
이 대작가들은 왜 주인공들을 떠돌이로 묘사를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사람의 생각, 가치관이라는 것이 공간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정보, 같은 이슈들에 직면한다. 사람들의 사회적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기에, 내가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과 했던 대화의 소재가 지하철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어제 나눴을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2021년의 서울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부동산 가격, 주식 투자, 비트코인 투자,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이슈들에 익숙했을 것이고, 비슷한 티비 프로그램, 유튜브 채널을 보며, 비슷한 맛집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떠돌이 생활이 어땠는지 구체적인 묘사가 없을지라도 그 사실 자체가 정착해서 살고있는 이들과는 다른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정처없이 여러 곳을 떠도는 인생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과 두려움에도 떠도는 삶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알바니아에 어떻게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청년들은 왜 미국, 독일로 탈출할 수 밖에 없는지, 축구를 싫어하는 브라질 남자의 학창시절이 어떤지. 다른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듣는 것은 그거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 떠도는 삶 속에서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는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길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단순히 연봉과 집값, 획일화된 행복을 추구하는 삶보다 내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 기회를 제공해준다.
나는 또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른다.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이제는 역마살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정착할 수도, 아니면 몇몇 선배들처럼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가보지 못했던 한 지역으로 또 떠날 수도 있다. 불확실성은 대체로 스트레스를 주지만 이런 불확실성은 아직까진 나를 설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