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의 중요성
유학을 나오기 전, 지금은 언제인지 까마득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언젠가, 존경하던 한 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유학을 앞두고 인사차 연구실을 들른 때였다. 교수님께서는 오래 전 당신께서 유학을 하던 시절을 떠올렸는지 창 밖 너머를 한 동안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셨다.
"인내해라."
유학을 가서 박사과정을 마친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넘은 것이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박수를 쳐줘도 괜찮다고 덧붙이셨다. 스스로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조언이 가진 참 뜻을 알기란 쉽지 않다. 으레 하는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오래 전 유학을 하셨던 분이라 박사학위에 대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실 수도 있겠거니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박사과정 오퍼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미국으로 날아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던 때라 남들의 시덥잖은 조언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5년 뒤 당연히 박사학위를 받을 것이었고, 학위를 받은 후 어디서 무슨 연구를 할지 나름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유학을 나가 코스웍을 하는 동안에도 연구가 마냥 재밌다고 생각했었고 논문을 읽을 때마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리터러쳐를 확장시킬 수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소위 말하는 탑저널에 실을 만한 그런 대단한 논문을 쓰겠노라 확신했다. 인생이 그렇게 RPG 게임처럼 순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회과학 분야 박사과정 중 1-2년차는 코스웍이 주된 일이고 논문을 쓰기에 필요한 툴과 리터러쳐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면 3년차부터는 공식적으로 논문 주제를 교수님들로부터 컨펌을 받고 1년간 스스로 논문을 써야힌다. 3년차에 접어들어 그동안 치열하게 고민해봤다고 생각한 주제에 대해 연구제안서를 쓰고 교수님들께 컨펌을 받기 위해 미팅을 하길 수차례. 연구의 프론티어에 계신 분들께 의미 있는 연구주제라는 얘기를 듣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이라는 걸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상상조차 못했다. 리젝을 먹은 연구제안서들이 하나 둘 쌓여 대여섯가 되고 나서야 겨우 하나를 건져 일단 데이터를 확인해보라는 얘길 들었다. 그러나 또 데이터를 돌려보면 막상 내가 생각했던 가설에 맞지 않기 일쑤. 길이 없어 보였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패기는 어디가고 난 도저히 연구를 할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찾은 연구주제들은 늘 가설이 잘못 되었거나, 큰 의미가 없거나, 누가 했거나, 아무도 할 수 없거나. 그렇게 3년차 첫 학기의 몇 주가 흐르고 나니 가만히 있다가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자다가 서너번은 깼으며, 일어나면 등은 식은 땀으로 축축했다. 비로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5년이 지나면 그저 주어질 줄로만 알았던 박사학위는 너무나도 멀어보였고, 탑저널 논문은 커녕 평범한 논문 한 편 조차도 내가 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쯤에서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을 했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의 채용공고를 찾아본 적도 꽤 있고 지원을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때쯤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떠나는 친구들도 여럿 생겼다. 그래도 어렴풋이 인내하라던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차피 지금 박사과정을 엎어도 반쯤 망한 인생, 2년 뒤에 그만둬도 망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2년 정도는 일단 참아보자.
좌절이 계속될수록 좌절감이 주는 정신적 데미지의 양은 점점 줄어들었다. 연구에 대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기껏 열심히 구해서 클리닝한 데이터로부터 예상과 다른 결과를 도출하는 건 디폴트였다. 지금 박사학위 논문이 된 연구의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건 3년차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리터러쳐로부터 주제를 발전시켜 교수님들께 컨펌을 받고 동일한 주제의 워킹페이퍼가 있는지 확인하기까지 몇 개월, 데이터의 액세스를 얻기까지 몇 개월, 데이터를 연구 가능한 수준으로 클리닝하기까지 몇 개월.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기까지 1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로도 실패와 좌절은 반복되었다. 9번의 실패가 있으면 1번의 작은 희망이 주어졌고 한 두달에 한 번 정도는 대실패를 경험하고 또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찾아보곤 했다. 때마침 코로나가 겹쳐 학교는 폐쇄되고 연구실에 나가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연구를 지속해나가야 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한인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고, 유튜브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기도 했다. 누군가 인생에서 힘들었던 순간을 물어본다면 주저할 것 없이 이 때를 꼽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느낌을 2년 간 참으며 꾸역꾸역 버텼고 결국 졸업논문 드래프트도 나오고 잡마켓 커미티 교수님들로부터 졸업 준비를 하고 잡마켓에 나가도 좋다는 컨펌을 받게 되었다.
얼마전 잡마켓을 앞두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있었던 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학부 때, 석사 때 같이 유학 준비를 하고 비슷한 시기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몇몇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발표가 다 끝난 후 저녁식사에서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 친구가 말했다. 한동안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자다 깨면 늘 등이 식은 땀으로 축축했었단다. 그 동안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지 이야이가 한 동안 이어졌다.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구나,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그걸 묵묵히 견뎠던 그 친구들에게도 경외심이 들었다. 교수님의 말이 맞았다. 여기에 오기까지 다들 꾸역꾸역 버터내며 자신의 한계를 한번 넘어섰을 것이고, 그 의미를 알고 나니 박수를 쳐줄 수 밖에 없었다.
때때로 누군가 박사과정 유학을 가면 어떨지 물어볼 때가 있는데 웬만해서는 다른 길을 먼저 찾아보라고 얘기해준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마쳤을 때 막상 얻게 되는 리턴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유학을 막상 나오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각오를 하고 나와야 뒷통수가 덜 얼얼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박사과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에 후회는 포함되지 않는다. 박사과정을 끝낸다는 건 그래도 누군가에게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을 한 번 해본 것이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이든 뭐든, 스스로의 한계에 부딛힌 상황에서 그걸 극복했던 경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이 아무 의미 없는 우연들의 집합체인 우리 인생에 약간이나마 의미를 부여해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