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봐야 아릅답다
어느덧 또 한국 갈 채비를 하고 있다. 5년이 다 되어가는 유학생활 중 참 많이도 한국과 미국을 오고갔다. 일반적인 유학생들은 1년에 한 번을 한국에 갈까 말까 라는데, 나는 개인적인 일로 웬만하면 매년 2번 겨울에 한 달, 여름에 두 달을 꼭 한국에서 보냈다. 이번 겨울 한국을 방문한다면 단기적으로 한국을 오가는 건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 그 다음에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는 한국에 완전히 정착할 테니까. 그래서 마지막 한국여행?을 앞두고 지금껏 느낀 소회를 써보고자 한다.
미국에 오기 전 일평생 한국에서만 살았음에도 나는 늘 해외를 바라보고 살았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책이나 미디어로 외국을 접할 때면 이상하게도 난 늘 그곳에 대한 동경에 빠졌다. 이게 얼마나 일찍부터 시작이 되었는가 하면, 유치원 다니던 시절 [축구왕 슛돌이]라는 만화를 보면서도 축구 그 자체보다는 축구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 제노바로 유학을 간 주인공의 상황과 제노바라는 도시 자체에 매료되었다. 머리가 좀 자란 이후로는 소설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느껴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나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었을 땐 자유분방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주인공들의 해외를 떠도는 인생이 이상적 삶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마도 무언가를 터득하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떠도는 삶 그 자체가 낭만이자 자유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두번째로는 어릴 때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것인지 무엇인지 인재라면 응당 해외에서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범람했다. 미디어에선 중국 경제가 뜨고 있으니 글로벌하게 영어에다 중국어까지 섭렵해야 한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고, 대학교에선 글로벌 무슨 무슨 학과들이 등장했으며, 하버드니 스탠퍼드니 이름만 들어도 엔돌핀이 도는 그런 학교의 유학생들의 수기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속된 말로 글로벌하게 살아야 가오가 산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글로벌하게 미국에 나와 알게된 사실은 그 글로벌이란 말은 상상 속의 개념일뿐, 사람은 늘 로컬에 속해 살게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해외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의 로컬에서 다른 로컬로 옮겨가는 것이며, 새로운 로컬에서 어떻게 융화되어 살아갈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벗어나 정착했던 미국의 이 도시를 하나의 객관적인 로컬로 인식했듯이, 서울을 하나의 로컬로 다시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서울에 갈 때마다 방랑객처럼 지내보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 가면 일단 고향 부모님 댁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서울로 올라와 남은 기간은 여행자처럼 숙소를 잡고 한 달 이상을 지냈다. 물론 서울에서도 꽤 오랜 시간을 살긴 했지만 학교 근처에서 잘 벗어나질 않았던 터라, 서울에 살 때 경험하던 서울과 해외에 살며 경험한 서울은 같은 곳일 수 없었다. 나는 이 디아스포라 같은 생활에 꽤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애써 약속을 잡거나 하지 않으려 했다.
불행은 행운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코로나19로 호텔 업계가 극심한 부침을 겪으면서 수많은 호텔들이 한달 살기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덕분에 서울에 올 때마다 여느 오피스텔보다 싼 가격으로 꽤 나쁘지 않은 호텔에서 한 달간 지내는 호사를 누렸다. 한국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동안 한국에서 못한 일을 하느라 바쁘게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내 일상은 단조롭고 심플함 그 자체였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아침부터 숙소 근처 카페에 가서 논문을 읽거나 쓴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빈둥빈둥 거리다가 오후 느즈막히 2-3시간 정처없이 걷다가 들어가고 싶은 음식점이 보이면 저녁을 먹고 나왔다. 저녁엔 숙소에 돌아와 미국 시간에 맞춰 교수님들과 미팅을 하거나 러닝머신이라도 좀 뛰었다. 아닌 척 노력을 했으나 누가 봐도 백수, 한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몇 번 반복하다보니 서울이라는 도시 그 자체가 눈에 들어왔고, 막상 이 도시에 살 때 느끼지 못했던 사실들을 깨달았다. 우선 서울엔 걷기에 좋은 곳들이 정처에 널려있었다. 낮 시간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볼 수 있는 오리나 잉어들은 여기가 당최 메갈로폴리스가 맞나 싶은 의심이 들게 했고, 덕수궁 돌담길에서부터 정동길을 지나 서울역사박물관까지 가다보면 유럽 어느 동네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효창공원, 서촌, 서울숲, 연희동, 경의선 숲길도 걷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대도시에 이런 곳들이 무수히 많다는 건 행운이다. 사실 미국의 웬만한 도시에서 차 없이 다닌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내가 사는 도시도 다운타운은 꽤나 위험하고 웬만해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많은 경우에 길을 지난다는 것은 단순히 A라는 곳에서 B라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지, (A, B) 구간을 이동할 때 어떤 즐거움을 느끼기 쉽지 않다. 뉴욕, 토론토와 같은 대도시도 마찬가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생기가 느껴지는 것도 좋다. 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인지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구조에 보통 사람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는 그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 흥미롭다. 복잡한 교통 인프라, 끝도 없이 보이는 빌딩숲, 가게들이 빽빽한 시장과 상업지구. 그 속에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일하고, 사고 파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재밌는 기분이 들고 어릴 때 밤새도록 하던 [심시티]라는 게임이 생각났다. 게임에서도 운영하던 도시가 폭망할 수 있듯이 모든 도시가 다 이렇게 활기 찬 건 아니다. 한때 잘나가던 디트로이트, 로체스터와 같은 도시 한복판을 지날 때는 빌딩의 창문들이 깨져 있거나 "For Lease"라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광경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시경제학 분야의 거장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는 [도시의 승리]라는 저서에서 도시를 인간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곳으로 묘사했다. 고도로 집약된, 활기 찬 대도시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의 속도를 높여 우리가 더 많고 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도시에 산다는 건 때론 어지럽지만 동시에 많은 재밌는 일들을 겪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서울이, 더 넓게는 한국이 마냥 살기 좋은 곳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내가 미국으로 왔던 이유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로컬로서 서울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의 영향이 크겠지만 서울로 꼭 한 번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외국인 친구들이 급격히 많아졌다. 미어터지는 지하철과 하늘 꼭대기에 있는 집값에 진절머리 날 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느꼈던 서울의 인상을 반쯤 지우고 마치 여행자가 된듯 도시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