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관조하는 태도
방학 때마다 한국에 지인들을 만나러 다녀올 때면 항상 느끼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게 행복하다는 점과,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게 어지럽다는 점이다. 나는 MBTI로 따지자면 천성이 E인 사람이라 지인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늘 좋아했고 헤어지는 시간이 늘 아쉬웠다. 그런데 해외에서 박사과정 생활을 한 이후로, 어쩌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요즘은 사람들과 만날 때면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해외 박사과정의 생활은 거북이의 삶과 같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매일 똑같은 일을 똑같은 속도로 느리지만 끊임없이 하는 생활. 흡사 농부의 삶이고, 수도승의 삶이다. 온전히 개인으로 존재하며, 통상적인 사회 속 삶과는 좀 거리가 있다. 사회 속 삶이라 함은 말그대로 직장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공동체에서 다른 이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삶이다. 이런 생활은 재밌는 동시에 어지럽다. 요즘은 어떤 드라마, 예능이 재밌는지, 부동산이 어떻고 비트코인이 어떻고, 대통령이 뭘 했고 이런 저런 사건 사고가 있었고. 수많은 얘기들이 그야말로 홍수처럼 내게 쏟아진다. 나도 모르게 뉴스 피드를 훑어보고, 부동산 가격을 살피며, 유튜브로 새로운 소식들을 찾아보곤 한다. 그래서일까.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앙토냉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이라는 책에 정신적 생산성을 높이려면 사회에 조금 무관심해질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래서 별로 재밌을 게 없는 유학생활에도 좋은 점이 하나 있다.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조금 떨어져서 삶을 관조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 미국에서 나의 시간은 한결같이 느리고 복잡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세상을 좀 여러가지 방향으로 생각, 아니 공상해볼 수 있다. 연구도 필연적으로 공상에서 시작하지만, 연구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성에 대한 내 가치관도 비로소 이런 생각들로부터 정립이 된다. 나는 왜, 어떤 태도로, 무엇을 목표로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고민하는 건 회사에서 격무에 시달릴 때, 오르는 집값을 보며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육아에 매진하느라 정신이 혼미할 때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가 해결되기 때문에 이런 한량같은 생각에 빠질 수도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한 도시에서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산책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지 강한 의문이 들지만... 이런 생활이 그런 깊은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높은 차원의 사고는 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와 좀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적잖은 책들도 읽어도 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도 배우고, 뿌리 깊게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었다. 어찌보면 평생 이렇게 고독스러운 생활이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한정된 시간 동안이라도 외부의 방해 없이 내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해볼 수 있었다는 건 정신적 성장에 적잖은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얼마 남지 않은 졸업 후 평생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하기에, 돌이켜보면 전혀 즐겁진 않았어도 전혀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컨베이너벨트 같은 우리 사회는 참으로 냉혹해서 "잠깐만, 나 생각할 시간 좀 가질게"하고 내릴 틈을 쉽게 주지 않는다. 그러다 나중에 여유로울 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미루다 보면 훌쩍 지나버리는 게 인생이라 아이러니컬하다. 그럼에도 지금 바로 손에 쥔 걸 내려놓고 용기 있게 멈춰서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용기를 리스펙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이런 고민의 시간이 좀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인생을 개척하는 믿거름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