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it until make it.
박사과정 졸업예정자들이 본격적으로 직장을 구하는 잡마켓 시즌이 한창이다. 박사과정 졸업자들에 대한 구인구직 시장을 심플하게 표현하자면, 졸업논문을 들고 나와 이 논문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여기저기서 홍보하고 강의하면, 그 내용이 마음에 드는 대학, 연구기관, 기업들이 채용해가는 곳이다. 따라서 이 논문 한 편이 채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도 같은 이 시장은 굉장히 냉혹해서 언제 어딜 가나 내 논문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소위 잡마켓 스타라고 하는 시장의 꼭대기에 위치한 졸업예정자들의 졸업논문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의 역량과 내 논문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제로로 수렴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Fake it until make it. 테드(TED)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강의 중 하나에서 Amy Cuddy 하버드대 교수가 했던 말이다. 의역하자면,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면, 그걸 이룬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이다. 즉, 내가 학과 수석이 되고자 한다면 이미 학과 수석인것처럼 행동하고,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면 이미 변호사가 된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지 연기를 하란 뜻이 아니다.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이미 되었다고 생각할 만큼 누구보다 강한 믿음을 가지라는 이야기이다. 심리학자인 Amy Cuddy는 몇 가지 호르몬 작용을 근거로 들며 이러한 주장을 했지만, 내 짧은 경험에만 비추어보아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논문을 쓰는 데에는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이 걸린다. 이것은 하나의 마라톤이고, 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지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이것은 박사과정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박사과정 내내 나의 연구가 충분한 기여가 있는지, 의미가 있는 연구인지 스스로 끊임없이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 연구가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고, 다른 친구들의 연구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아 보인다. 거기다 데이터분석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인생을 포기하고 그냥 절에 들어가는 게 어떨까 심각히 고민을 해보게 된다. 이럴 때 나를 지탱해주는 힘은 다른 누군가의 응원과 지지가 아닌,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내 연구가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내가 평생 연구를 계속할 역량이 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뼈저리게 느낀 한 가지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역량에 대한 믿음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미국인 학생들은 대체로 어디서 저런 믿음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항상 자신감에 차있었다. 몇 년 전 조쉬라는 미국인 선배가 졸업논문을 발표할 때였다. 발표 전 그의 논문을 읽어봤던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이게 몇 년을 투자한 졸업논문이 맞나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발표에서 그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이미 존재하는 대가들의 비슷한 연구들과 비교해 학계에 기여한 바가 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해서도 조쉬는 앞으로 10분 동안 왜 자신의 논문이 그 대가들의 연구들보다 나은지 설명해보겠노라 대답했다. 한국인으로선 상상해본 적도 없는 답변이었다. 발표가 끝났을 무렵, 그 까탈스러운 교수님들에게서 좋은 연구, 흥미로운 페이퍼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기백 같은 것이었을까. 조쉬는 결국 미국의 꽤 괜찮은 대학의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이런 말을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자신감을 가진다고, 스스로를 믿는다고 인생이 뭐가 달라지나. 전혀 현실성이 없는 말이라고 반문한다. 단언하건대, 난 세상 누구보다 현실적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고, 로또 같은 확률이 낮은 게임에 단 한 번도 베팅을 해본 적이 없다. 나 자신을 믿는 건 그저 정신승리인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정말 현실적이고 진지하게 내가 그런 자리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면, 식은 땀부터 나기 시작한다. 내가 과연 그 자리에 맞는 연구를 뽑아낼 수 있을까? 그곳의 다른 교수들과 연구에 대해 토론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가 갑자기 대기업 CEO가 된다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거나, 세계적인 연주자가 된다고 상상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리에 걸맞는 역량도 없이 그런 성취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세상에 그만한 불행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성취를 할 것이라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에 맞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너무나 간절해지는 것이다.
내 행복을 위해 미국에 남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 나는 하나의 구체적인, 그러나 그때 당시의 역량으로 내가 도전할 수 없었던 목표를 세우기로 했다. 내가 다녀 본 도시 중 가장 살고 싶었던 곳에 있으면서, 학자로서 충분히 뜻을 발휘할 수 있는 명망 있는 학교에 임용이 되자고 말이다. 그래서 난 박사과정을 마치고 싱가포르국립대(NUS)에서 교수직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싱가포르국립대는 아시아권에 있지만 교수진에 좋은 대우를 해주기로 유명하면서, 동시에 미국만큼 빡센 테뉴어 심사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세계적 수준의 교수진을 보유한 대학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 NUS에서 테뉴어를 받은 교수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이들이 어떤 논문들을 썼는지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의 논문을 써야 테뉴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내 잡마켓 페이퍼의 최소 수준을 이들이 쓴 논문의 수준으로 잡고, 박사과정 중간중간 내 논문이 최소한 그 정도의 퀄리티를 보이는지 되물었다.
올해 잡마켓에 나온 나는 얼마 전 NUS에서 인터뷰를 보자는 연락을 받았고, 인터뷰를 본지 이틀 만에 NUS로부터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교수직 오퍼를 받기 직전 마지막 단계이며, 모든 경비를 NUS에서 커버를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아직 최종 관문이 남았다. 그리고 만약 최종 오퍼를 받더라도, 지금 나의 선호를 고려하면 한국의 연구소나 대학으로 가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종적인 선택과 별개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목표로 한 것을 마치 이룬 사람처럼 내 수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제 최종 단계에 왔으며, 이걸 이룬다면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래서 난 프리젠테이션이 전혀 걱정되지 않고 오히려 기대감을 느낀다. 난 이미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구자가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내 성과를 알리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