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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소리 Aug 10. 2023

박사유학생의 경제적 자유에 관하여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며 (5)

경제적 자유.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의 2020년대식 고상한 표현이다. 물론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내 수준에 맞는 적절한 소비/여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자산과 (노동소득이 아닌) 자본소득을 달성하고 싶음을 함의하고 있기도 하다. 박사과정 유학생과 대척점에 위치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박사과정 내내 경제적인 자유를 몸소 느꼈음을 얘기하고자 한다. 이 경험은 단순히 유학생활을 넘어서서 개인으로서 생애를 거쳐 어떤 재무적 가치관을 정립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려주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에 가장 직접적인 교훈을 주는 챕터 중 하나는 성장이론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경제적 성장에 대해 논하는 이 분야의 함의는 개인의 경제적 성장에도 일부분 대입할 수 있다. 가장 고전적인 솔로 성장모형(Solow Growth Model)은 쉽게 말해 일찍이 덜 쓰고 계속 재투자를 이어나간다면 더 빨리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초등학생도 아는 얘기를 뭣하러 하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지만, 당연한 진리일수록 왜 그것이 실천하기 어려운가 고민해봐야 하는 게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당연한 진리를 실천만 하면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경제학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하나의 혜택?이라고 한다면 경제학자들의 경제적 활동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솔로모형의 진리를 전혀 어려움 없이 실천하고 있는 A 교수님이 계셨다. 40대 일본인인 그는 미국이 아닌 자국에서도 괴이하게 보이는 사람일 것이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여름에는 늘 반팔 티셔츠, 반바지 조합을 한결같이 입는 A 교수님은 한겨울에도 슬리퍼를 신고 걸어서 출퇴근하며 늘 학생들이 주로 가는 식당에서 식사라기보다는 끼니를 때웠다. A 교수님과 친한 일본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A 교수님이 생필품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돈을 쓰는 것이라고는 맥주와 스타벅스 커피뿐이었다. 취미로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한국 아이돌의 영상을 챙겨보는 것이 다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네 한량 내지는 노숙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학과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A 교수가 천재적인 이론 경제학자라는 점을. 이미 조교수로 부임한 지 3-4년 만에 탑저널에 수 편의 논문을 게재해서 테뉴어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끊임없이 매년 탑저널 논문을 생산하고 있었다. 다른 어느 교수님이 말한 적이 있다. A 교수는 맥주 마시고 논문만 쓰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의식주에 돈을 쓰는 데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A 교수님은 학교 근처의 주택 한 채와 도쿄 중심가에 아파트 한 채를 어렵지 않게 보유할 수 있었다.


박사과정 학생들의 삶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A 교수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매달 일정 수준의 월급(stipend)이 나오지만 코스웍으로 바쁜 1-2년 차 때는 물리적 시간이 없기 때문에 어딜 나가 아이쇼핑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3년 차부터는 머릿속이 온통 연구로 가득 차기 때문에 시간은 많아도 뭘 사고 싶다는 소비욕구 자체가 들지 않았다. 미국의 마켓컬리라고 할 수 있는 인스타카트를 통해 매주 똑같은 생필품들을 구매했고, 유학기간 5년 내내 아마존에서 산 물건 리스트를 보면 하나하나 기억이 날 정도였다. 주변 대부분의 학생들도 돈이 거의 들지 않는 넷플릭스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거나 친구들과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여가를 보내곤 했다.



이렇게 보면 일평생 검소하게 산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학부 시절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프리미엄 청바지 브랜드를 모델 별로 콜렉트하기 위해 미친 듯이 알바를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엇인가 사고 싶은 마음은 별달리 할 일이 없을수록, 성취해야 할 목표가 없을수록 커지는 듯하다. 박사과정은 감각 하나하나를 연구적 성취지향으로 맞춰야 하기에 소비욕구가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그래서인지 유학 기간 내내 소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으며, 방학마다 한국을 들락날락했음에도 수천만원을 모을 수 있었다. 그저 생활 전반에서 소비라는 활동의 중요도가 떨어졌을 뿐이다.


알고 지내던 한국의 교수님들이 고위공직자가 되시면서 의도치 않게 뉴스를 통해 이분들의 재산 내역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분들이 몇십억 단위의 재산을 축적한 걸 보고 놀라곤 했는데, 해당 교수님들이 평소 연구에 매진하고 검소하게 지내신 걸 떠올리고는 단순히 우연이거나 상속재산 때문만이 아니란 걸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교수로 부임한 이후 박사과정 때에 비해 월급이 10배 가까이 뛰었다. 너무 큰돈에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그저 핸드폰에 찍힌 점수처럼 느껴졌다. 내 소비습관은 박사과정 때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필수적 비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월급을 그동안 모아 오던 etf에 투자하고 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돈을 사용하는 것보다 축적하는 게 더 좋은 사람은 꽤나 많다. 초등학생도 아는 기본적인 경제원리에 따르면, 이 축적하는 게 더 좋은 사람이 경제적 자유를 달성하기 쉽다는 건 자명하다.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재계의 존경 받는 인물들은 대부분 돈을 축적하는 데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었다. 쓰지도 않는 돈을 왜 축적하냐고 반문한다면 여기에 대한 철학과 이론을 얘기하는 데에도 책 한권이 필요할 것이다. 박사과정 생활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집중하는 삶은 돈에 대한 가치관을 축적 지향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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