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에서도 머리 손질을 하고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 봐줄 사람도 없는데 뭔 유난이냐고? 이는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리추얼이므로 보고 감탄해 줄 관객은 필요 없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에너지가 생겨나니까. 베개에 눌린 머리와 부스스한 얼굴을 정돈한 후 달라진 나의 모습을 보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난다. 이 욕구는 책을 읽거나 강연을 찾아 듣게 하고, 집안일 또한 즐겁게 만든다. 나 자신을 잘 대접해줬다는 뿌듯함이 더 활기차고 부지런한 나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를 땐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순전히 일을 위한 옷을 입었다. 낡은 티셔츠와 무릎 나온 바지를 유니폼 삼아 살았었다. 그러나 두 아이가 다 독립한 지금, 내게 주어진 가사 노동은 과거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다. 굳이 낡고 펑퍼짐한 옷을 입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도 기분에 따라 옷을 고르고 색을 맞춰 본다.(김치나 대청소하는 날은 제외다) 거기에다 목덜미가 서늘한 날엔 스카프를 둘러주고, 날씨가 꿀꿀할 땐 작은 귀고리라도 달아주면 나의 특별한 하루가 시작된다.
옷에 대해 먼저 얘기했지만, 사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머리 손질이다. 짧은 내 머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여지없이 모양이 찌그러져 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머리에 물을 적시고 모양을 잡아줘야 한다. 긴 머리라면 질끈 동여매는 것으로 스타일링을 끝낼 수 있겠지만, 그 편한 머리를 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이건 정말 부모님 탓을 할 수밖에 없는데, 내게 어울리는 머리는 오로지 짧은 커트뿐이다. 그래서 숙명이겠거니 하며 매일같이 머리를 누르고, 펴고, 부풀린다. 눌리고 삐쳐나간 머리로는 나의 행복한 리추얼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므로.
나는 멋 내기를 좋아한다.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은 후에 느껴지는 새로움과 상쾌한 기분이 좋아서다. 그래서 나는 외출 찬스를 즐겨 사용한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청바지에 티셔츠 정도는 갖춰 입고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가는 것이다. 목 늘어진 티셔츠에 생얼로 활보하는 사람들이 허다한 밴쿠버에 살고 있지만, 나 좋자고 입고 찍어 바른다. 정신없이 바삐 살던 과거에도, 집 밖을 나설 땐 음식 냄새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립스틱만큼은 발랐었다. 가족을 위해 만들고, 먹이고, 치우고, 닦고, 씻고, 빨아대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일에 눌린 내 모습을 집 밖으로까지 가져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빨간 립스틱으로 피부를 한 톤 높여주는 사소한 변신을 즐기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사소한 변신을 즐긴다. 화장한 후 달라진(나아진) 내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 안 할 이유가 없는 거다. 커버력이 거의 없는 묽은 파운데이션과 아이라이너, 그리고 립스틱을 사용할 뿐이지만, 화장은 나를 변화시키는 소확행이다. 거기에다 옷까지 차려입으면, 어렸을 때 하던 인형 놀이가 떠오르곤 한다. 인형의 얼굴과 옷을 바꿔가며 다른 역할을 부여했던 것처럼, 내가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끌어대자면, 장소에 따른 옷과 화장은 분명 기분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 가면을 바꿔가며 여러 역할을 한 고대 그리스 연극의 배우들처럼 나 또한 때와 장소에 맞춰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가면과 내가 화장을 하고, 지우고, 옷을 갈아입는 것은 같은 맥락 아닐까?
집 안에서든, 밖에서든 나를 치장하는 것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고, 내 삶을 생산적으로 만들어왔다. 집콕 생활이 길어지며 코로나 블루스라는 용어까지 등장한 요즘이지만, 나는 집에 있으면서도 아침 리추얼(매무새 단장)을 하며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소소한 행복을 위함이었는데, 삶의 향상을 덤으로 얻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곱게 단장을 하고 하루를 보낸다. 혹자는 여자들이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타인을 의식해서라는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나는 나를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