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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oist Sep 27. 2017

"우리 죽지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꿈의 제인>과 『사랑의 단상』

상처는 셀프입니다

종종 혼자라는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여기, 오롯이 나만.


닭과 달걀 중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알기란 꽤나 어렵습니다. 수없이 부유하는 관계가 나를 외로움으로 내몬 것인가, 아니면 나라는 세계에 스스로 갇혀 있기에 관계에 스밀 수 없는 것인가. 그 무엇이든 생각 끝엔 '누구에게라도 나 자신은 온전히 이해되어질 수는 없다'는 불안증에 사로잡힙니다.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친구, 직장동료 모두에게 말입니다. 아주 지독합니다.


그래서 영화 <꿈의 제인>은 불편합니다. 주인공 소현이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행하는 처절하고도 서툰 생존방식에서 저의 태도를 발견했기 때문일까요. '나홀로'라는 거세될 수 없는 통증은 역설적으로 아주 어설픈 관계맺기에 집착하도록 합니다. 종국에는 타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기억을 상실해 실수를 연발합니다.



거짓 역사 앞에 동등한 나와 너

그런데, 다시 본 <꿈의 제인>은 따뜻합니다. 소현을 보듬는 이상적 존재인 제인이 비로소 눈에 띕니다. 영화는 일단 (아마도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거짓말부터 배웠다는 소현의 의미심장한 자기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청자가 불분명한 이 발화는 우연한 장소에서 트랜스젠더 제인을 만나 위로받습니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사람들 눈에는 보이니 거짓말하는게 되는 그런 'so special'한 것이 붙어있는 트랜스젠더 제인이기에 온몸으로 말합니다. 인생은 상대에게 절대 이해받을 수 없는 간극을 안고 가야 하며 그로 인한 불행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고.


퍽 냉소적으로 보이는 메시지는 오히려 소현의 거짓도 덤덤하게 만드는 열쇠가 됩니다. 없어야 할 것이 더 붙어있는 제인과는 다르게, 있어야 할 한쪽 새끼발가락이 없는 소현은 이따금 발가락이 진짜 있는 것처럼 간지러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상대만 마주해왔습니다. 하지만 제인은 보이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런 제인 앞에서 만큼은 사랑받고 싶어서 애쓰지 않아도 존재 가치가 충분해집니다.



결핍은 존재의 증거

결국 소현도, 제인도, 우리도 태어나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의 서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바르트가 쓴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도 찾은 해답입니다.


그는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플라톤 『잔치』, 각종 정신 분석학 텍스트, 니체와 사르트르의 말, 독일 가곡 등 다양한 출처를 빌린 알쏭달쏭한 언어 기호로 사랑에 대한 감정적 파편을 그려냅니다. 역시 언어 기호학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한 학자가 빚어낸 산물답습니다.


특징적인 점은 이 책이 결코 사랑이라는 관계로 엮인 두 주체의 상호작용 담론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혹은 사랑에서 깨어난) '나'라는 1인칭 화자가 그리는 초상화이자 자전적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로 인해 사랑보다는 사람 간의 관계성에 대한 단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나 아래 문단은 타자와 맺는 관계의 본질을 선명히 드러낸다고 봅니다.


욕구불만의 형상은 현존일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매일 보지만 충족되지 못한다. 대상은 실제 저기 있으나, 상상 속에서는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난 네가 아니고 넌 내가 아님에 존재 자가 곧 서로에 대한 불충족이라는 말. 어쩌면 끊임없이 쓸쓸하고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해 슬픈 아픔은 살아있는 증거이자 사랑하는 증거라는 의미가 <꿈의 제인>을 다시 보게 만든 것입니다.



이해받기를 포기하면 보이는 것들

여기서 <꿈의 제인>은 더 나아갑니다. 혼자는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마법처럼 소현과 제인은 더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연대가 이뤄집니다. 개같이 불행한 인생 속에서 어쩌다 즐거운 날이 있으면 됐다는 말을 하며 제인은 옅은 미소를 띄웁니다. 제인이 일하는 무대를 찾아 'unhappy'로 양각된 방문도장이 팔목에 찍히자 소현 역시 희미하고도 편한 웃음을 짓습니다. 불안을 굳이 해소하지 않자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위태로운 개체들은 끝으로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합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날 것을.


어찌보면 제인은 환상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인과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유효하지 않죠. 균열이 잦습니다. 제인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증발되어 버리기도, 제인의 분신처럼 여겨지는 새로운 인물 지수가 뜬금없이 점멸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짜깁기되어 무엇이 현실이고 판타지인지 혼란스럽다가도 그 경계가 무의미해짐을 깨닫습니다. 제인과 같은 환상적 인물은 우리 스스로의 소환술에 운명이 달려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외롭고 불행한 얼굴로 살자고 외치는 이 괴짜가 이미 안에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혼자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혼자라는 즐거움입니다. 여기, 오롯이 나만. 그리하여 너도.




<꿈의 제인>

감독: 조현훈

출연: 이민지, 구교환, 이주영

개봉: 2017.05.31


『사랑의 단상

저자: 롤랑바르트

출판: 동문선

발행: 200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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