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만 하면 과거를 상기시키는 친구가 있습니다. 결코 많은 일을 들추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한 날 벌어진 단 하나의 사건을 사골처럼 우려냅니다. 골자는 ‘네가 날 좋아하는 신호를 보냈다.’ 눈빛과 행동으로 자신에게 보내는 특별한 사인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매번 복기하는 당시의 조건과 환경은 달라집니다. 자신도 희미해지는 기억을 인정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친구의 당당함이 그저 재미있어 웃어넘기다가도 문득 과연 그 날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좋아한다’는 전제 자체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때때로 사실을 바로 잡아줍니다. 어떤 모습이었든 그건 관심 있음의 신호가 전혀 아니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눈치는 아닙니다. 사소한 해프닝이 누군가에게 특별해지는 일은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친구와의 진실공방은 웃고 즐길 사연으로 그만입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의 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상황과 마주하면서 서로의 거짓과 진실을 밝히려는 줄다리기를 벌입니다. 사랑하니까 진실해야 하고 또 사랑하니까 거짓이 필요한 이 난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입니다.
거짓과 진실의 줄다리기
영화 <클로저>는 진실과 사랑, 그리고 그 해석의 상관관계를 풀어냅니다. 일단 진실에 목마르고 상처 입는 네 남녀를 바라봅니다. 직업부터 서로의 내밀한 진실에 닿기가 어려움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댄은 완곡한 어투로 각색을 거친 부고란 기사를 쓰고 소설을 집필합니다. 안나는 낯선 사람을 찍는 포토그래퍼, 알리스는 가명을 쓰는 스트리퍼, 래리는 신체의 표면적인 부분을 살피는 피부과 의사입니다.
단적으로 소설은 뮤즈의 삶을 각색하고, 사진은 대상과 관찰자 사이 필터를 두고 의도를 담습니다. 알리스는 유일하게 댄의 소설과 안나의 사진을 통해 모든 피사체가 됩니다. 그는 현실엔 ‘진실만이 빠졌’으며 ‘다른 이의 슬픔을 너무 아름답게 찍는다’는 말을 던지며 거짓으로 점철하는 이들을 힐난합니다. 두 쌍의 남녀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알리스의 생각처럼 거짓 아닌 진실을 서로에게 요구하면서 고통에 빠져듭니다.
알리스와 댄, 안나와 래리 커플. 그들 사이에 댄과 안나가 비밀 연애를 1년 동안 지속하고 댄은 불시에 사실을 알리스에게 알리면서 균열이 일기 시작합니다. 상처주고 싶지 않지만 이제 와서 더 이상 숨길 수도 없다고 항변하는 이 남자는 ‘난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을 진실로 내세웁니다. 알리스는 사랑은 거부할 수도 있는 순간의 선택임을 강조해보지만 뜻하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마음엔 생채기가 납니다. 진실 앞에 수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병치되는 또 하나의 다툼이 있습니다. 알리스와 이별한 댄은 반대로 안나의 진실 앞에 자신이 한없이 유약해집니다. 댄은 안나가 이혼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래리와 재회한 후 잠자리까지 했음을 추궁해 밝혀내지만, 그녀가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에 가끔 거짓말도 해보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굳이 들추면서 거부하고도 싶은 마음은 다시 요란한 이별을 고하게 합니다. 플래시백을 통해 안나는 어떤 감정도 없이 만난 래리의 우격다짐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간 것임이 밝혀지지만 댄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치 않습니다. 진실은 이렇게 자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입니다.
갈 길 잃은 진실, 그 위태로움
반전은, 진실의 자의성을 간파하고 애초에 냉소를 던진 인물이 알리스라는 사실입니다. 알리스는 사랑으로 엮인 적 없던 래리 앞에서 가짜 신분을 내려놓습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알리스도 아닌 제인입니다. 댄은 알리스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이름조차 들어볼 수 없었다는 것이 기막힌 속사정입니다. 물론 댄은 알리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힘겹게 다시 만난 알리스에게 역시 래리와의 만남에 대해 전과 다를 바 없는 고백을 강요합니다. 이 난맥상에 무망함을 느낀 알리스는 끝내 ‘거짓말하기도 싫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으니 끝’이라고,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사랑이 대체 어디 있느냐’고 일갈합니다. 진실이란 얼마나 위태로운지.
이렇듯 흩어지는 말 속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묻기로 합니다.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의 마음, 너의 마음, 나의 말, 너의 말 그 중간 어디쯤이리라 따져 보지만 텅 빈 실체는 받아들이는 청자의 해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야 맙니다. 단 그 누구도 탓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인간은 오해의 동물
하물며 우리가 손쉽게 믿는 확률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 마당입니다. 데이비드 핸드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를 접하며 확률의 허상과 진실 혹은 사랑을 이해하는 자의성이 묘하게 비슷하다고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대개 아주 작은 확률로 일어난 일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운명, 필연, 신의 계시 등 다양한 설명거리를 찾고 어떤 이유로든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려 합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핸드는 극히 작은 확률로 일어나는 사건들도 필연성의 법칙, 아주 큰 수의 법칙, 선택의 법칙, 확률 지렛대의 법칙, 충분함의 법칙 등에 의해 지극히 평범한 일로 치환될 수 있다고 논증합니다.
우연의 일치를 설명하는 다섯 가지 법칙에 따르면 개연성이 극도로 낮다고 생각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다.
가령 사건이 일어난 뒤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상황의 미세한 변화로 엄청나게 높은 확률을 미미한 확률로 바꾸고, 비록 다른 사건일지라도 그 성격을 충분히 유사하다고 여기면 아주 대단한 우연의 일치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해석이 낳는 확률의 자의성에 따라 우리의 일상은 흘러갑니다.
사랑은 해석을 타고
진실만이 아닙니다. 진실을 감싸 안고자 하는 사랑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클로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곡,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의 더 블로어스 도터(The Blower's Daughter)가 흐르는 오프닝과 엔딩은 명백히 대조를 이룹니다. 처음 군중 속에서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주인공처럼 당당히 걸어 나온 두 남녀 댄과 알리스. 영화의 끝엔 알리스였던 제인만이 군중 속을 파고들며 사라져갑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이 일상적 스침이 되는, 사랑의 생사를 표현한 수미쌍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운명이라는 것인가,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는 우연이라는 것인가. 진실의 실체만큼이나 부질없는 원형 찾기이겠습니다. 사랑의 주기는 두 주체가 만들어 가는 해석의 방향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의 추천사에는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구절이 소개됩니다. 칼 세이건이 앤 드루얀을 향해 남긴 헌정사입니다.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분명 ‘거의 0에 가까운’ 확률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사랑이라는 숙명적인 일이 이미 일어난 후에 되돌아보면 그럴싸한 확률적 연결고리를 사후 선택하기 쉽습니다. 반면 너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맺어질 가능성까지 기회를 확장하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사랑은 끊임없는 운명적 해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의지인 겁니다.
진실도, 사랑도 부유하는 허상이자 단단한 알맹이입니다. 모순적이지만 현실입니다. 친구가 ‘네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고 주장하는 농담이 가능한 이유도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 세상에 둘도 없는 반려자를 만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진정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만남은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 둘 사이엔 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없었다는 느낌을 서로가 잘 간파했기에 장난스러운 얘깃거리를 하나 얻었을 뿐이겠지요. 그 날의 진실을 둘러싼 해석만큼은 합의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