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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Mar 13. 2018

어떤 만남

첫번째 이야기(2편중 1편)

    

 실낱같이 내리는 흰 눈 사이로 비질을 해 내려오고 있는 할아범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거리를 찾아 하는 할아범은 눈이 쌓일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집을 할아범 혼자 건사하기에 이젠 버거운 연세라 관리인을 따로 두자고 누차 얘기해 왔지만 손자와 자신을 거두어 살게 해 준 은혜를 갚게 해 달라는 말에 한해 두 해 미루어 오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적적하고 큰 집이 무섭다고 어머니마저 우리 집으로 합친 이후로 할아범 혼자 남아 이 큰 집을 지키고 있다.

비질을 멈추고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보고 있던 할아범이 “이게 뭐여” 하고 내민 종이에 ‘샤프’라고 적혀있다. 고택 체험을 위해 들르는 꼬마들을 위한 보물찾기 쪽지인 것 같다.


  삼십여 년 전의 그 날이 보인다. 한 살 위인 막내 삼촌과 동갑인 할아범의 손자 기범이 나 이렇게 셋은 해뜨기가 무섭게 함께 어울려 놀이를 했다. 큰 채 할아버지의 사랑방에 모여 천자문을 배울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함께였다. 기범이가 없으면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나의 청을 마지못해 수락한 할아버지가 기범이도 함께 공부하도록 허락을 하고 나서 동몽선습을 채 마치지도 못했는데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어른들이 좋다 하는 모든 약과 의원들을 모셔오느라 정신이 없을 때 우리는 그저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의 부재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할아범은 행랑채에 들르는 나에게 항상 이렇게 종이를 내밀면서 “이게 뭐여 “ 하고 물어보곤 했다. 언문도 깨치지 못한 할아범은 기범이가 쓴 한자들을 신기해하면서 그것을 꼭 나에게 확인을 해 보는 것이었다. 나이가 한 살이나 더 많고 그러니 당연히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투덜대는 기범이를 제쳐두고 손자의 말이 내가 말한 것과 같을 때에만 희미하게 보이는 어설픈 웃음기를 띠곤 했었다. 


  어떻게 해서 그리고 언제부터 할아범과 기범이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내 기억 속에는 항상 그들이 함께였었다. 기범이가 가정을 이룰 때쯤 나의 어머니가 대신해서 모든 혼사를 진행했지만 아들인 나와 차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의사가 된 기범이를 볼 때면 대견해하는 눈빛을 하면서도 한낱 회사원인 아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기범이 처가 쪽에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부모에게 하는 예단을 보내왔을 때 어머니는 정말로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며 흡족해하셨다. 어머니의 그러한 단순한 성격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편안케 해서 기범이 처도 나의 안사람도 친동기간처럼 지내며 어머니와 서로 모녀간이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 같다.


  나는 한 살 아래였지만 삼촌과 기범이와 같이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세 사람이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삼촌은 일찍이 예술에 뜻을 둔 자유로운 영혼이라 공부에도 가문의 법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벌이가 일정치 않은 삼촌을 위해 이런 곳에 살면서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면서 종가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넌지시 말을 꺼내었을 때도 삼촌은 일언지하에 잘라 버렸다. 자신은 역마살이 있어 한 곳에 못 박고 살 팔자도 아니고 가문에 매여 있고 싶지도 않다고.


언젠가는 내가 떠맡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할아범이 있어 그럭저럭 지낸다. 하지만 자주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다. 지자체의 지원으로 비용 부담은 줄었지만 보수를 해야 할 일이 한 두 군데가 아니고 무슨 행사가 그리 많은지 얼굴 내밀 일도 심심치가 않을 정도이다. 종갓집이란 개인의 소유인데도 결코 개인의 것이 되지 못해서 지금의 어른들 몇 세대가 지나가지 않는 이상 사유재산권을 행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넓은 터에 전통 한옥들을 갖고 있다 보니 큰 부자인 것 같아 보여도 우리처럼 외지에서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신경만 써야 하는 속 빈 강정일뿐이지 않느냐는 아내의 잔소리에 반박할 근거가 없다. 그저 우리 것을 지켜나가야 하는 역사와 민족의식을 들먹일 뿐이다. 

    

  오늘도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설을 앞두고 이곳에서 지낼 마지막 차례에 대해 집안 어른들께 상의를 하러 내려온 길이다. 아파트 생활을 해본 어머니가 그 설렁한 집에서 차례 준비를 하기가 겁이 나고 힘이 드니 이제 서울로 제사를 옮겨 오자고 제안을 하셨고 이번 차례에 집안 어른들께 통보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거야 설날에 자연스럽게 모여서 꺼낼 수도 있는 말이지만 당장 정월 초사흘에 조부 제사를 지내야 될 형편이다 보니 미리 말씀을 아니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내 항렬의 젊은 사람들이야 참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들어 어쩌면 반길 일이기도 하겠지만 시골에서 무료하게 세월만 보내는 어른들은 종갓집 제사가 큰 행사인지라 서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할아범은 사람을 사서 해야 하는 큰일을 빼고는 집안 곳곳에 비워놓은 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손수 깔끔하게 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선산으로 가는 길은 일 년 내내 말끔하게 해 놓는다. 부엌이야 가스불로 음식을 만들도록 이미 개조를 해 뒀지만 아래채와 사랑채 모든 방들은 아직도 나무로 군불을 피워야 하는 옛날 아궁이라 손도 많이 가야 하고 겨울이 들기 전에 장작도 한 차씩 들여놓아야 한다. 할아범은 벌써 불쏘시개용으로 솔 갈비 한 짐씩과 장작더미를 아궁이마다 쌓아 놓았다. 솔갈비는 틈틈이 뒷산에서 손수 긁어다 놓았을 것이다. 

  갓을 쓴 어른이 없다 뿐이지 방안 공기는 답답한 찜질방이 연상될 정도다. 텔레비전으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고 어지간만 살아도 자식들을 대처에서 교육시킨 동네라 자신들도 크게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별말씀들은 없다. 하지만 마뜩잖은 표정들과 내뿜는 열기는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뭐 그렇게 하겠다면 그래야지 우리야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 

“하이카라 신식 교육을 받은 여자가 이런데 와서 살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자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제사는 여기서 모셔야 도리가 아니겠나 싶네” 

이런 정도로 일차 허락을 받은 것만 해도 생각보다는 수월한 일이다. 일찍 신식 교육을 받고 가문에 매인 삶을 가급적 피해온 아버지의 덕이리라



                                                             -  주말에 2편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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