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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Nov 05. 2018

함께 할래요?

빨강머리 앤의 후속 이야기


  아이들이 오는 날이라 지난밤 잠을 설쳤는데도 불구하고 뾰족이 얼굴을 내미는 아침 해처럼 새로운 설렘이 마음을 채워온다. 길버트의 은퇴식을 두고 아이들에게 연락을 한 것은 잘한 일 같다. 이제 일을 그만두게 되면 시간이 자유로울 테니 그때 함께 아이들의 집을 방문해보자던 길버트의 말도 수긍이 가긴 했지만 그의 건강이 어디까지를 허락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아버지의 은퇴식에 참석해 줄 수 있는지 연락을 했다. 클로에도 피터도 참석하겠다는 답이 왔었다.


  결혼 문제로 갈등을 빚은 후 집을 나간 클로에는 4년 만에 오는 집이다. 간간이 오빠 제임스에게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나와 길버트는 그 아이의 남편이 어떠한 사람인지 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인 피터 또한 긴 여행 중이고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 때도 돌아오지 않아 거의 2년 만에 보게 되는 것이다.

“앤, 잠을 자기는 했소? 밤새 뒤척이더니 이렇게 일찍 아침상까지 차려 놓다니”

“좋은 아침이 예요, 길버트. 아이들이 오는 날이라 시냇가에 가서 꽃을 좀 꺾어 왔어요. 어릴 때 살던 집이라 낯 설 테고 손을 보긴 했지만 집이 너무 낡아서 아이들이 불편한 점이 많을 거예요.”

“그러니 시내에 있는 집에서 모이면 교통편도 편리하고 지내기도 좋을 텐데 왜 굳이 여기로 오라고 한 거요?”

“우리가 살던 집이지만 이제는 스티브의 진료실을 겸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그 집으로 모이면 며느리도 불편할 거예요.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 이 집에서 살아갈 테니 아이들의 소리로 예전의 그 온기를 되살리고 싶기도 해서예요.”


  길버트는 성실하고 자상한 의사로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여행을 좋아하고 한 곳에 묶여있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하던 사람이 몇십 년을 어떻게 그 좁은 사무실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지낼 수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가 자신의 눈에 문제가 생겼다고 처음으로 말하던 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큰 도시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 보자고 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말한 그때에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때였고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암흑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때였다. 지난 수년간 길버트에게 생긴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말대로 올 졸업생을 끝으로 나도 학교에서 하던 일을 잘 마무리 한 뒤 그와 함께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시력을 잃은 마릴라 아주머니를 간호해 본 적이 있으니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머니처럼 길버트가 삶에 의욕을 잃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잘해 나갈 것이란 자신감도 있다. 

    

  현관 앞에서 길버트와 브라이언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마 내일 열릴 그 은퇴식의 마지막 점검을 위해 상의 차 들른 것이리라.

“브라이언, 왔구나”

“네 선생님. 참석하겠다고 연락 온 사람들이 많아서 선생님 말씀처럼 소박하게는 못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좀 더 큰 장소가 필요해서 진료실 대신 교회로 장소를 옮길까 해서요.”

“앤, 내가 뭐랬소? 조용히 그만두겠다고 그렇게 여러 번 말을 했건만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으니 어떻게 할 셈이오?”

“길버트, 나도 소박하게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은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작은 모임이라도 하자고 해서 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지금이라도 취소하는 게 어떻겠소.”

“선생님, 그동안 두 분이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는지 아시잖아요. 저를 포함해서 이 마을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학교를 다니고 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제 할 일들을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도 선생님들께 뭔가를 보답해 드리고 싶어 모이는 거예요. 전혀 신경 쓰실 일이 아니 예요. 단지 장소만 옮기게 되었다는 걸 알려드리려 했을 뿐이 예요. 그럼 내일 뵙도록 하고 그만 가보겠습니다.”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내 보이며 길버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고집쟁이의 옹고집이 스스로 빠져나갈 때까지 한동안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 저런 모습은 꼭 클로에를 보는 것 같다. 그 착한 아이가 어떻게 3년이 넘도록 연락을 끊고 지낼 수 있는지...... “ 

    

  차 소리와 사람 소리가 시끌시끌하다. 린드 아주머니의 늦둥이 수잔의 말소리가 멀리서부터 그득히 울려온다. 엄마의 목소리와 수다스러움을 그대로 닮아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일이 궁금해서 몇 번씩이나 들르더니 클로에의 방문 소식에 나보다 더 흥분한 것 같다.

“앤, 앤, 어서 나와 봐 클로에와 피터가 왔어 예쁜 꼬마 아가씨도 함께 말이야.”

“엄마, 우리 왔어요. 누나랑 조카 에이미도요.”

피터의 뒤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클로에와 눈처럼 하얀 꼬마 여자애가 보인다. 클로에의 딸, 내 손녀인가 보다. 


  아빠와의 어색한 인사 후에 가만히 안겨오는 딸애의 조그마한 어깨가 살며시 떨린다. 4년 만에 느껴보는 이 여린 온기가 내 몸 전체에 전해진다. 그 일이 이 아이에게는 그렇게 큰 문제였던가? 가족을 떠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던가. 되뇌고 되뇌던 물음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부질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클로에는 명랑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길버트와 내가 바깥일로 바쁘게 다닐 때도 아픈 동생을 엄마처럼 보살피면서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해 책만 있으면 언제든 행복한 아이였다. 일찍 철이든 마음씀이 대견한 아이라는 믿음이 강했기에 그 애 역시 어린아이 일 뿐이라는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다.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 돌봐야 할 그 사람들이 우선이었기에 이 아이가 마음속의 외로움을 책으로 달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누구나 칭찬하던 그 아이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 줄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당당한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원했던 우리의 반대가 심해지자 그를 택해 집을 나가고 소식을 끊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걸 간과한 결과 이리라.

4년이라는 시간을 이 짧은 포옹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길다. 차차 그리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우선은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겠지.


  검게 그을린 피터의 건강한 얼굴이 누나 뒤에서 웃고 있다. 누나와의 일을 알고 있기에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비친다.

“피터, 좋아 보이는구나. 그래 여행은 어떠했니? 인도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 줄은 몰랐는데 지낼 만하던가 보구나.”

아들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른 채 길버트가 집으로 들어간 후, 엄마 뒤에 꼭 붙어있는 에이미를 손짓해 불러본다.

“어쩜 아이가 이렇게 뽀얗고 예쁘니. 너 어릴 때도 이렇게 예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에이미는 자기 아빠를 닮았어요. 가브리엘의 피부가 맑거든요.”

“그런가 보구나. 그래 왜 같이 오지 않았니?”

“엄마 아빠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혼자 왔어요. 차차 오게 되겠죠.”

“그래, 가브리엘은 뭘 하는 사람이니?”

“글 쓰는 사람이 예요. 가끔씩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요. 좋은 사람이 예요.”

“좋은 사람이니 네가 택했겠지. 뭐 차차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아빠와 피터가 기다리고 계실 거야.” 

    

  병원 진료를 끝내고 온 제임스와 레이첼이 함께한 저녁식사는 사람 사는  곳다운 번잡함과 활기가 가득하다. 직접 기른 채소로 푸짐한 요리를 해 온 수잔은 사실 우리 집 일이 더 궁금했기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기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에 자기가 끼일 곳은 아니니 음식만 전해주고 가려고 한다는 소리를 벌써 다섯 번이나 했건만, 클로에의 남편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 피터는 이제 여행을 그만하고 집에 정착할 것인지, 제임스와 레이첼은 언제 아기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까지도 참견을 하고 있다.

“수잔, 그런 것은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식사부터 하자꾸나. 먼 길을 오느라 다들 배가 고플 테니.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

“제임스 형, 형도 이제 의사 선생님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나 봐. 형처럼 유명한 의사는 이런 작은 곳보다는 큰 도시에 있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유명하긴 뭘, 이제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려 했는데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어서 나도 난감하다. 프랑스 대학에서 초청장을 받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 중이야.”

“아버지도 좀 쉬실 때가 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신다는 소식에 좀 놀랐어요.”

“피터 도련님, 아버님의 눈에 좀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진료를 볼 수가 없게 된 걸요.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레이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피터와 클로에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아빠, 눈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얼마나 심각한 건데요? 치료는 가능한 거예요?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클로에,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란다. 그동안 연구하느라 눈을 좀 혹사시킨 것이라 쉴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

“좀 천천히 알리려고 했는데......”

“어머 어머님 죄송해요. 저는 다 알고 모이는 줄 알았어요.”

“괜찮다 레이첼. 어차피 알아야 할 사실인 걸. 얘들아, 아빠 눈에 문제가 생긴 걸 나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단다. 지금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구나. 아빠는 몇 년 전부터 이상이 생긴 걸 알고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방법을 알아보셨다는데 결국 방법이 없었다는구나. 이제 한쪽은 거의 안보이시고, 나머지 한쪽도 곧 시력을 잃으실 거란다.”

“그럼 마릴라 할머니처럼 되는 거예요? 그동안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치료방법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피터, 할머니랑은 좀 다른 병이라는데 방법이 없기는 매 한 가지라 나봐.”

“형, 형은 의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알 거잖아. 자세히 설명해봐.”

“나도 안과는 세밀히 알지는 못해. 다만 지금까지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그동안 아버지가 환자들을 돌보느라 시간 내기가 어려워 잠을 줄이고 연구하시면서 눈에 무리가 많이 간 것 같아.”

“얘들아, 이제 다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다. 그동안 아빠와 스티브가 여러 방면으로 다 알아보고 애를 썼지만 결과는 같았어. 더 나쁜 일이 아닌 것에 감사드리자. 다행히 아빠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제 이런 조용한 곳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기로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마릴라 할머니 집이 아직 남아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좀 낡긴 해도 화장실을 안으로 들이고 여러 곳을 수리해서 지내기에 괜찮을 것 같구나.”

“수잔 아주머니가 애를 많이 쓰셨어요. 실력 있는 목수랑 여러 가지를 손수 알아봐 주셔서 한결 수월했어요. 아주머니,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 정도는 뭐. 이웃끼리 다 도와가며 살아야지 제임스. 앤과 길버트 일이라면 우리 마을과 여기 주변 마을에서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나도 앤이 돌아와서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쁘단다. 매일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바깥세상 이야기도 들으면 얼마나 좋겠니.”

“수잔이 옆에 있어서 나도 마음이 놓인단다. 린드 아주머니와 마릴라 아주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지냈듯이 우리도 그렇게 지내보도록 해. 여기 애븐리의 아름다운 숲과 개울이 있는 한 삶은 행복할 거야. 나는 이렇게라도 돌아오게 된 것이 너무 좋아. 매튜 아저씨도 마릴라 아주머니도 여기 이 집에서 함께 하실 거라 믿고 있어.” 

    

  비가 올 것 같이 잔뜩 흐려있어서 행사에 참석할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걱정했더니 점심때가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화창했다.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느냐고 투덜대는 길버트를 달래고 아빠 소식에 깊은 슬픔에 빠진 클레어와 피터를 다독이느라 오전을 보내고 가까스로 행사에 참석했다. <길버트 블라이드 선생님의 은퇴를 축하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행사장에는 그동안 가까이 지낸 마을 사람들, 길버트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한  아이들, 여러 곳에 살고 있는 나의 제자들이 모여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나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나 그러지 못하다는 사실에 몸과 마음이 불편할 뿐입니다. 해오던 연구를 끝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물러갑니다만 누군가는 반드시 이 연구를 끝내어 건강한 아이들로 자라게 해 줄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은혜 입은 모든 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짤막한 길버트의 인사말에 이어 마을 사람들과 젊은 청년들의 감사 인사가 이어지고 그동안 해오던 길버트의 연구 주제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끝내지도 못한 연구를 말해서 무엇하느냐고 시큰둥한 길버트를 대신하여 제임스가 일일이 대답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소아마비 백신 계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공동 연구가로서 프랑스 대학의 초청을 받아 연구를 계속해 나갈 생각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


  길버트의 후원으로 대학을 다닌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모금을 하게 되었고 런던에서 온 다이애나와 양장점으로 큰돈을 모은 루비, 매튜 아저씨를 도와주던 제리까지 모금에 참여하여 장학회가 구성되었다. 더 많은 아이들이 혜택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은퇴식에서 길버트와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모처럼 어릴 때 친구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이애나와는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루비, 조시 파이, 제인 앤드루스, 그리고 나를 좋아하던 찰리 슬론까지 어렸던 그 시절로 돌아 간 듯했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는 클로에는 아침부터 짐을 싸는 척 하지만 계속해서 눈치를 보고 있다. 에이미와 놀고 있는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돌아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매듭을 풀고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엄마 아빠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빠의 건강이 안 좋아 지신 것이 저 때문인 것 같아 더 죄스럽고요.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저도 두 분을 도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부모 또한 자식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아픈 일이다. 아무런 바람도 없이 순수한 개체로 자식을 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저 아이도 우리도 처음 해보는 자식과 부모의 역할을 능숙한 배우처럼 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색한 우리 사이를 피터가 끼어들었다. 자신의 아픈 다리로 인해 아버지가 백신 계발에 몰두하다 결국 실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하기엔 불편하고 죄지은 느낌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피터는 자라면서 사람들의 무시하거나 동정하는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언제나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았다. 공부에도 흥미가 없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친구처럼 의지하던 누나마저 집을 나간 후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해 했다. 그러다 결국 여행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피터 너는 언제 떠날 계획이니? 이번에 갈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좀 있다가 갔으면 해.”

“누나, 사실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야. 인도에서 붓다라는 성인을 알게 되었는데 굉장한 흥미를 느꼈어. 돌아가면 붓다와 그의 사상에 대해 좀 더 공부해볼 생각도 있고 이제 여기 엄마 아빠 옆에서 지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

“붓다가 어떤 성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피터가 흥미를 갖게 되었다니 대단하구나. 인도에는 원래 여러 사상이 발달된 나라라 사상가들이 많은 나라라고 하더구나. 우리 아들이 흥미를 느꼈다면 아빠도 알고 싶은데 설명 좀 해주겠니?”

“아빠, 아직 제가 알고 있는 건 너무 적어요. 더 공부해서 아빠 엄마께도 꼭 말씀드릴게요. 사실 두 분이 괜찮으시면 인도로 가서 공부를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많이 있어요.” 

“피터, 우리는 괜찮단다. 아직 아빠가 완전히 실명한 것도 아니고 내가 옆에 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단다. 제임스 형도 옆에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지.”

“클로에도 이제는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서로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문제가 아니다. 세대가 다르니 서로의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한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좀 힘들었을 뿐이다. 너의 삶이니 네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 조만간 가브리엘도 만나고 싶구나.”

“죄송하고 고마워요 엄마 아빠.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고 있어요. 살아가면서 더 노력할게요.”

“내일이면 클로에도 가고 피터도 조만간 떠날 것 같으니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갈까?”

      

  처음으로 내가 이 집에 오던 날이 생각난다. 아름다운 벚꽃길이며 방 안에서 내다본 풍경들 그리고 친구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에이미도 이 아름다운 초록지붕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꿈꾸던 그 행복한 시간들을 함께 하겠지. 이곳 여기저기에 얽혀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그 애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릴라 아주머니, 메튜 아저씨, 오늘은 클로에도 피터도 클로에의 딸 에이미도 함께 왔어요. 아저씨 아주머니가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지 보세요. 조그마한 꼬마 하나를 받아들임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주신 거예요. 실수도 많았고 잘못 생각한 것들도 많았지만 아주머니처럼 열심히 사랑을 나누며 살려고 노력했어요. 

길버트도 아주머니처럼 눈이 안 보이게 된다고 하네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걱정 없어요. 아주머니도 용기 내어서 잘 사셨잖아요? 제가 길버트 돌보면서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 많이 하면서 살 거예요. 사실 아주머니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지만 말이예요.  아주머니가 아프실 땐 제가 바빠 함께한 시간들이 적었지만 언제나 아주머니는 제가 해드린 이야기들을 재미있어하셨잖아요. 이제 아쉬움 없이 마음껏 말로도 글로도 써 볼게요. 혹시나 에이미가 커서 읽을 수 있다면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그들의 가슴에 사랑을 키우는 불씨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언제나 저희들이랑 함께 하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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