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자 들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상당수의 여자들은 나만을 특별히 여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굳이 여자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그 흔한 남자 사람 친구조차 없는 나로서는 남자들의 마음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여자들의 마음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요즘 인기 있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드라마가 삼 생을 이어가는 순애보로 이러한 여자들의 로망을 채워 주고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주인공이 비혼을 부르짖는 여자 주인공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이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결혼 적령기를 살짝 넘긴 그때, 부모님의 한숨에 소위 맞선이라는 만남을 여러 번 가졌었다. 쉽게 마음을 주는 성격이 못 되는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한다는 것에 심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결혼해서 살아보니 그야말로 드라마 제목처럼 그놈이 그놈이고 사랑이고 나발이고 아무짝에 쓸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만 꽃다운 그 나이에야 어디 그러했겠는가. 사랑의 환상이 온 마음을 감싸고 있을 때였으니 잠재의식이 그러한 꿈으로라도 위로받고 싶었나 보았다.
꿈속에서 나는 어느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여러 고개를 넘고 넘어 외 딴 초가집 앞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났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나의 삼신할미이란다. 꿈속에서도 ‘아 진짜 삼신할머니가 계신가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 걸어오더니 말했다.
“그렇게 찾아 헤매었는데 이제야 만났네요”
“누구세요 당신은?” 하고 내가 물었다.
삼신할미가 끼어 들어서 말한다.
“아이고 그렇게 사랑하고 못 잊어하더니 잊어버렸나 보네. 이 사람과 너는 너무나 사랑하던 사이였어. 부모님의 반대로 이 사람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도 너를 잊지 못해서 평생을 그리워하며 지냈지.”
“나는요?”
“넌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지냈어. 여러 생이 바뀌고도 이 사람은 너를 잊지 못해 찾으러 다니다 이제야 만난 거야.”
“당신이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이 생에서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아나요?” 하고 물었다.
“내일 3시 25분에 당신 앞에 현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다.”라며 표를 한 장 내밀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던 때였고 나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결근을 했다.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받은 표가 극장표와 비슷해서 영화를 보러 가야 하나 궁리를 했다. 그 당시 뻔질나게 연락을 해 대던 모씨는 은근히 기대했건만 회사 동료들과 낚시를 가서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엄마랑 김치만 담아놓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면서 보니 화장대 위에 놓인 시계가 3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금의 남편이 한 전화였다.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만난 사이였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중이라 딱 한 번 만났었다.
키도 작고 잘 생기지도 않은, 꿈속의 그 남자와는 확연이 다른 남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결혼을 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끔 모든 일들이 그렇게 되어갔다고 하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33년이 지났다. 꿈일 뿐이라고 말은 했지만 내심 나는 몇 생을 이어온 사랑이라 믿으며 정말 남편에게 내 온 마음을 다했다. 서운한 것이 있어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면서 운명의 짝을 굳게 믿어왔다.
결론은?
다 소용없다.
운명?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사랑?
개떡이다.
전생이고 내생이고, 현생이나 잘해라 라고 외치고 싶다.
그리워한 것도 그였고, 몇 생을 찾아 헤맨 것도 그였는데 그 과보는 왜 기억도 못하는 내가 받아야 하나 하는 억울한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래도 나는 드라마 속의 그 남자 주인공을 보면서 영원하지 못할 사랑의 환상을 아직도 깨지 못한다.
몇 생을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나를 위해 남편도 언젠가는 내 마음을 헤아려 줄 날이 있을 거라는 환상을.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다. 깨어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