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감정도 나다

by 스윗제니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자기중심적이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아무리 이타적, 희생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할 지라도 자신의 기본생존이 해결된 이후라야 가능하다.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상황을 겪을 때마다, 그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가장 우선시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때로는 감정이란 녀석이 판단의 탈을 쓰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 사실은 실리적 판단에 의한 선택이 아닌 마음의 갈등인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어찌보면 인간의 인생은 자기 감정과의 무한 사투의 과정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생존본능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감정’을 이성의 도움을 받아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다. 아니, 모든 것은 저절로 표출된다.


자기중심적이라는 현상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 청결, 과식, 나태 따위의 가치가 중요할 리 없다. 그는 전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된다. 그런데 사람이 둘 이상 모일 때부터 사람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비롯된 행동이 타인 또는 사회 영역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 비로소 가치 상대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는 가치상대성의 존재를 억압 또는 부정했다. 오히려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좌우하는 어떠한 가치를 자연주의 도덕 또는 절대도덕 따위로 부르며 가치 절대성이란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관된 사상철학과 종교 발전시켰다.


그 시절, 감정은 '허락된 상황'과 '합법적 유희' 안에서 맴돌았다. 세분화되고 다양한 감정을 가지기보다 보다 감정을 단순화하려는 시도와 존재자체를 부정하려는 이성의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을 소인배, 감정을 초월하는 사람을 대인배라 칭하며 모든 사람이 대인배의 삶을 향해 내달리면 이상세계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축된 사회는 편안하고 안정되었을지 몰라도 사람 개개인은 많이 아팠다. 열등감, 죄책감, 미안함, 질투와 시기 등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나쁜 것, 제거해야할 것, 악한 것이라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 감정의 소유주인 자기자신을 나쁜 사람, 없어져야할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장아장 걷는 유년기를 겨우 지나오면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시시각각 '넌 틀렸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 크고 작은 틀림 속에서 감정은 억압되고 소거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사람마다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기 어려운 본심이 따로 있고, 그 본심은 언제나 자기중심적, 피해망상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의 마음 속에는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인격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실체 자체는 '부정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서 '옳다'. 그런데 이를 부정하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의 주인인 사람도 아프다. 즉, 솔직해지면 마음의 병이 낫는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단 한사람. 나를 공감해주는 사람에게.


그 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일까. 아주 오랜 기억을 되살려보자. 우리는 누구나 아주 어린 시절 온전한 공감과 응원, 지지를 받으며 살았던 적이 있다. 제대로 앉지도 먹지도 기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그 때 우리는 부모로부터 전폭적인 '존재에 대한 지지와 인정, 공감'을 받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부모의 지지, 공감은 우리가 자라나면서 서서히 옅어지는 듯 보인다. 실은 부모 마음 속에선 나에 대한 공감과 지지가 끝을 모르고 뻗어나는 나무처럼 계속 자라고 있다. 하지만 내 자식이 나보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 '기대감'이란 이름의 흰 장막이 부모 심연 속 공감과 지지의 실체를 뿌연 안개처럼 가려놓아 자식인 내가 부모의 속을 들여다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린 이 세상에 더이상 내 존재에 대한 공감과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나의 못난 감정은 온전한 공감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너의 실체가 어떠한 모습이건 그 자체를 용납하고 지지한다는 응원이 바로 공감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는 동지애마저 내비치는 과정 역시 공감이다. 공감을 받은 사람은 곧 안심을 하게 되고,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한 후 곧 스스로 치유를 시작한다. 갓난아기적부터 의문을 품어왔던 자기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밑바닥부터 다시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확실한 공감은 의사의 처방보다 강하다고 했다.


사람마다 인격, 지능, 판단, 아량의 크기와 결, 역량이 다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같은 마음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전부 개별적이고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 자기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 타인에게내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로는 본심, 흑심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 마음이 다 같기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평등하다.


근래에 들어 문화계에 핫한 키워드가 바로 '힐링'이다. 모두가 상처받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태곳적부터 사람은 늘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아왔는데 새삼스럽게 힐링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원인을 가족의 붕괴에서 찾아보고 싶다. 최근에는 전에 없이 '개인주의'에 대한 동경이 전 사회에 투명한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된다는 신념은 연애와 결혼마저도 '가성비연애', '반반결혼'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연애는 회사원화 된 지 오래고, 예전부터도 결혼은 일종의 거래였지만 사랑이란 낭만이 덮고 있었던 본질의 민낯을 이제 대놓고 드러내 계약화되었다. 한번 받으면 한번 갚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보편적 인간관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하고, 주고받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양과 질을 끊임없이 측정해야 한다. 피곤하다. 가족들마저도 타자화되어 개인주의, 즉 나 이외의 타인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우리'로 살았던 과거에는 가족이 나의 물리적, 심리적, 차원적 울타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날 낳아준 부모가 조금 일찍 죽더라도, 형제들 중 누군가, 또는 나를 맡아 길러준 누군가, 사촌들 중 누군가 나와 코드와 신념이 맞는 대가족의 멤버 중에서 공감 담당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가족의 테두리가 컸기에 가족 안에서 나의 심리상담소가 운영되었고, 그 한사람이 해주는 공감의 깊이와 범위도 넓었다.


허나 이제는 가족의 개념 자체가 희미해지고 옅어졌다. 가족은 더이상 개인의 안락한 울타리가 아니며 오히려 속박하는 족쇄가 될 때도 있다. 효도는 돈으로, 자식교육은 외주로, 생활은 각자 알아서 하는,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 나쁘게 말하면 '무늬만 가족'. 가족과 가족들은 계급화되고 계량화되는 세상.


사람은 타인의 공격이나 침범에 의해서만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이 관심을 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상처다. 가족들 간에는 전투적인 관심을 주고 받아야 된다. 그래야 마음에 영양이 공급되어 숨을 쉬고 살 수 있다. 지나친 관심 뿐만 아니라 무관심도 때론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지금 우리는 가족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공급해주고 있는가. '누가 널 때렸어? 엄마가 가서 혼내줄게.'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아픈 것은 정상이다. 당신이 아픈 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다. 못난 감정도 나다. 못난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이전 18화페미니즘 웬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