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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Sep 21. 2021

저도 이런 곳에 당신을 초대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곳] 흥선동 재향군인클럽 _ VETERAN's CLUB

  다양한 지역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출신 지역을 언급하게 된다.

  "저는 서울 000구에서 왔어요."

  "저는 인천에서 왔어요!"

  "저는 의정부에서 왔습니다~"


CRC부대 철조망

 

 차례가 되어 의정부 출신임을 밝히고 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의정부' 부대찌개가 대화 주제로 떠오르고 미군부대, 306보충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많은 남성들이 군복무 추억을 떠올리는 도시. 미군이 주둔해 있는 도시. 부대찌개(미군부대에서 나온 햄, 고기를 넣고 끓인 찌개)의 원조. 군사도시.

 실제로 의정부는 불과 20년 전까지 8개 미군부대가 주둔 있었다. 가장 많은 미군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도시였다. 지금은 6개 미군부대가 반환되고 가장 큰 규모의 2개 부대가 남아있다. 한국전쟁 이후 의정부는 미군부대에서 파생된 산업으로 발전했다. 도시 자체가 기지촌(군부대 주변에 군인 대상 서비스업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미군들의 폭력적이고 비상식적인 만행이 의정부 지역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국제 정세를 이유로 의정부는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다. 고사리 손으로 부모님과 함께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촛불을 들었던 것이 나의 첫 번째 집회였다.

 

 현재 의정부는 끊임없이 이주민이 유입되고 있다. 이주민 2세대인 나를 비롯한 2030세대 중 미군부대와 관련된 경험을 한 사람은 극소수다. 도시는 재개발로 과거 흔적을 지워갔고, 미군부대가 평택으로 대규모 이동을 하면서 미군을 직접 보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무엇보다 반환된 미군부대 부지는 의정부 땅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남의 땅처럼 느껴다. 부지가 반환되고 공여지 활용 계획도 마찬가지로 시민과 동떨어져 벌어지는 다른 세상 일이었다. 의정부가 군사도시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이를 다시금 환기시켜주지만 정작 현재 시민들은 의정부를 군사도시로 경험하고 있는 건 아니다. 명백하게.


 이렇게 도시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실제 시민의 삶이 동떨어져있는 도시도 드물다.

 도시의 핵심적인 문제에 시민이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미군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은 대부분 /내국인 출입금지/ 간판을 걸어놓았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고 미군이 떠나간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흥선마을 재향군인클럽 입구


 2021년, 스무살이 협동조합은 의정부문화재단으로부터 흥선마을의 재향군인클럽 공간 활성화 사업을 맡았다. 의정부가 품어온 오랜 문제(미군부대 관련)에 시민 당사자가 직접 접근해보는 최초의 공공 문화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향군인 클럽은 의정부 흥선동 미 제2사단이 주둔해있던 Camp RedCloud 부대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부대 앞 2차선 거리 초입에 위치한 재향군인클럽을 시작으로 흥선마을은 미군들을 상대하는 주점과 클럽이 빽빽하게 들어선 유흥과 향락 거리였다. 재향군인클럽은 미군이 직접 지배인을 고용해 운영하는 곳이었고 장성급부터 부사관, 일반 병사까지 편하게 술을 마시러 올 수 있는 주점이다. 특정 버십(미군부대원, 전역자)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직접 돈을 모아 운영되었다. 1993년부터 향군클럽을 운영해온 주인균(우리는 지미추라 부른다.)선생님은 미군들이 2018년 완전히 떠나간 이후에도 그 공간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리는 미군들의 전유 공간이었던 재향군인클럽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찾아오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전환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처음 향군클럽의 문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 했던 것은 청소였다. 2018년 이후로 제대로 운영된 적 없던 곳이라 오랜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었고, 생기를 잃은 공간이 머금은 무거운 냄새를 빼내기 위처절한(?) 청소 작업이었다. 운영 당시에도 제대로 기름 떼를 벗기지 않아 묵혀있던 10년이 넘은 환풍기 속 담배 타르와 냉장고 속 곰팡이들 닦아냈다.

 우리가 지워내려 했던 것은 [내국인 출입금지]라는 공간의 배타성이다. 이곳은 미군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미군들과의 추억만 가득 도배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달러가 기본 화폐였고, 영어가 기준이었고 성차별, 군대문화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공간에서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존재 이유 자체를 바꾸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단 누구라도 찾아올 수 있는 준비를 차근차근한다. 일단 그 무엇보다 청소부터.

 이 배타적인 공간이 심심해서 들고, 무엇인가 벌어지길래 기웃거리고, 누군가 재밌게 놀길래 같이 놀아보려고 들춰보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주변을 쭈뼛쭈뼛 서성이는 주민들과 시민들에게 "언제든 편하게 언제든 들어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일단 좀 깨끗해야 하니까..

 


 이 모든 과정을 이어오면서 향군클럽을 바꿔보려는 20대 녀석들은 80대 지미추와 조금씩 관계가 만들어졌다. 성조기를 사랑하고, 미군들과의 추억 향수에 젖어 아직도 미군들이 남겨준 20년 전 물건들이 최고라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만약 이 공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조차 섞을 기회가 없었겠지. 만약 이 공간을, 지미추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성조기를 들고 있는 그 어떤 어르신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미추와 수많은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반추하고 그가 겪어온 삶의 궤적들을 일부 헤아리자, 당장의 현상으로 마주하는 그의 모습 뒤에 가려진 배경이 보였다. 우리가 종종 잊고 있는 맥락을 말이다.


 공간이 어떤 맥락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궤적을 만들 것인가.

 전쟁 고아였던 지미추는 본인을 고통 속에서 구해준 미군부대에 은혜를 갚는다.

 지금 스무살이 협동조합은 공간을 중심으로 시민들과 만나는 커뮤니티 모임을 운영한다. 우린 지미추가 추구해 온 맥락을 새롭게 재편한다. 미군들이 놀던 공간을 시민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폐쇄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던 공간의 영역을 공감과 문화 콘텐츠를 중심으로 확대해 아우른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될 수 없는 것들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남겼다. 공간이 머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추적해나가는 작업이었다.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들(군인, 성노동자, 노숙자, 임대인 등)이 떠나면서 굳이 챙겨가지 않은 작은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기록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하고 현대사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추하는 전시를 꾸렸다.


 맥락을 가진 공간을 우린 '거점'이라 부른다.

 거점(據點) : 어떤 활동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지점.

 미군들이 이용하던 재향군인클럽을 어떤 근거로 사람들을 잇는 점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93년부터 2010년대까지 운영되었던 향군클럽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시민들에게 현재성을 부여할 수 없다. 우린 출입을 금지당했던 존재이기에.

 지미추라는 인물이 가진 기억과 추억을 재현하는 것은 의미를 협소하게 국한한다.

 일례로 향군클럽 한쪽 벽면에는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이 빼곡하게, 질서 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지미추가 처음 1993년 공간을 만들면서 지켜온 규칙이다. 최근 향군클럽을 찾은 4050세대 여성분들에게 그 벽은 과거 미군들이 자행했던 폭력적인 행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체가 되었다.


 물론 당장 지미추와 함께 이 공간을 만들어가는 우리는 이 지점을 조금 더 섬세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재현이 아닌 재편의 방식으로. 재현이 아닌 구현으로.

 재향군인클럽을 시민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방법으로 우린 이야기를 쌓기 시작했다.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듣고 관계를 쌓고 공간을 함께 상상했다. 오래전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들이 사라지기 전에 남겨두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거점)공간이 무엇일지, 향군클럽이 보유한 유구한 기억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의견들을 쌓아간다. 그리고 공감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공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소통한다. 

 향군클럽 거점을 다녀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의미는 확장되면서 재향군인클럽이 VETERAN's CLUB으로 재편되어갈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공간은 대체로 사의 단락이 끝나면 기능을 잃는다. 그 공간의 의미를 보존하는 방식은 그동안 기념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간과 그 속의 역사는 재현되어 기념관이 되어있지만, 정작 그 곳에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최근 도시재생 분야에서도 단순한 전시와 보존을 넘어 공간에 현재성을 담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 폐공장이 공연장이 되고, 예술가들의 레지던시가 된다. 폐교는 게스트하우스가 되고 쓰러져가는 여관은 커뮤니티 공간이 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기념하지 않는 기념관은 필요 없다. 살아있는 역동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재향군인클럽에서 미군들은 커뮤니티를 돈독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커뮤니티가 재생산되었다. 10년 전 아버지가 복무했던 미군부대에 복무하게 된 아들이 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하고, 부대를 옮겨 다니다가 20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은 사람도 있다. 부모가 남긴 유품을 향군클럽에 맡기고 떠난 군인,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에 눌러살고 있는 미군부대 요리사까지. 관계가 끊임없이 쌓이는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지나간 사람을 잊지 않으려는 정성 담겨있다. 또 20년 전만 해도 의정부에서 가장 트렌디한 문화가 만들어지던 곳이었다.

 재향군인클럽과 지미추가 남긴 유산을 확장해 시민의 관계가 축적되는 새로운 문화, 커뮤니티 거점이 될 수 있다. 재향군클럽은 30년 세월을 지나 이제 새롭게 2기를 시작한다. 2021년, 우린 이 공간에서 여전히 청소를 하고 있다. 의미를 발견하고 정리한다.  빈틈없이 빡빡하게 채워져 있던 향군클럽에 여백을 만든다. 앞으로 또 다른 주체들이 쌓아갈 새로운 30년이 이 공간을 물들일 수 있도록.


이미 나와 스무살이협동조합에게 VETERAN's CLUB은  거점이다.

살면서 성조기를, 미군들을 이렇게 자세히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성조기 사랑하는 노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미 재향군인클럽은 새로운 의미로 나에게 재편되었다.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도 VETERNA'S CLUB이 당신의 이야기를 쌓아 새로운 문화로 구현될 거점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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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김동희 @dongheekim0 (insta)

Project SNS  @the_veteransclub (in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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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소개

 사업 명 ㅣ  흥선 향군클럽은 재오픈 준비 중

 사업기간 ㅣ 2021.05.17. ~ 2021.11.30.

 지원사업 명 ㅣ 2021년 의정부문화도시 거점공간 조성사업

 주최  ㅣ  의정부시, 의정부문화재단


 VETERAN's CLUB 주소: 의정부 흥선로7

 방문 문의: 카카오톡 채널 '스무살이협동조합'


 공간 空間 
 공간이라 부르는 곳은 비어있다(空). 영어로는 SPACE. 우린 빈 곳을 채워나간다. 가구를 들이고, 벽을 바꾸고, 그림을 건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담는다.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은 그대로 그 벽과 바닥에 남아 흔적을 남긴다. 하나 바라건데, 새롭게 공간을 꾸미는 행위가 그 이전의 흔적들을 지우는 작업이 되지 말기를. 오래된 과거에 새로운 감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자연스럽게 의미와 기능이 전환되기를. 시간의 농도가 뒤섞여 의미를 차분히 전달하는 삼투 현상이 물리적인 공간에 풍만한 空間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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