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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Sep 28. 2021

나는 아직도 청소년 요금으로 머리한다.

[그-곳] 아쿠아미용실

 몇 년 전 남동생이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고 온 날을 잊지 못한다. 아마 군대에 입대하기 몇 개월 전, 인생 최대의 멋을 내보고자 수차례의 탈색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었 것으로 기억한다. 그 머리 색은 바다색이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물들이고 집에 들어온 날로부터 그 머리색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지만 아직도 그 깊은 푸른색을 내는 머리를 잊을 수 없다. 그 머리를 얻기 위해 4차례에 달하는 탈색과 6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도 지울 수 없는 충격이다. 사실 25만 원이라는 비용이 뇌리에 박혔던 거다. 그는 언제 그만한 돈을 머리에 쓰겠냐며 일주일치 푸른 머리를 위해 그는 거금을 들였다. 물론 몇 년이 지난 지금동생은 아직도 머리에 막대한 거금을 투자하고 있다.


 헤어스타일은 개인을 표현하는 중요한 패션 수단이다. 사람들은 전문 디자이너와 상담을 통해 스타일을 결정한다. 헤어디자이너는 친절하게 고객을 응대하고 고객이 원하는 머리를 디자인한다. 미용실은 쾌적하고 널찍해 카페처럼 편하게 쉴 수 있다. 주변 지인들은 머리를 하러 갈 때 기본 커트 비용으로 2만 원을 지불한다더라. 가격을 떠나 그만큼 헤어디자이너 전문성을 인정받고 자신만의 개성을 찾기 위해 미용을 소비하는 대중의 니즈도 상당히 늘어났다.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 받게 되는 서비스와 결과물로 마주하는 멋진 헤어스타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만한 값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난 이 문화를 꽤 오랫동안 누리지 않았다.

 10년 넘게 한 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없이 유지되고 있다. (머리에 가한 조작은 집에서 홀로 했던 셀프 염색이 전부다.) 미용실에 방문했을 때 머무르는 시간은 대체로 20분을 넘기지 않는다. 커트하는 시간은 길어봤자 10분이다. 이 시간은 다른 손님이 있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헤어디자이너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아주 뛰어나먼저 온 손님 머리를 볶다가 잠깐 짬을 내 빠르게 내 머리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상황에 놓이면 사전 대화가 이루어지는 우주 속으로 나를 던져 넣어야 한다. 셋이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된다. 미용실 입장과 동시에 디자이너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중 머리에 대한 대화는 거의 없다. 난 머리 하러 간 건데.


 대신 만 원짜리 지폐를 내면 아직도 천 원짜리 지폐 2장이 돌아온다. 8,000원이다. 금거래가 암묵적인 룰이다.

  


 처음 이 미용실에 발을 들인 건 중학교 2학년, 허세-겉멋 가득했던 중딩 때였다


 참고로 중학교 2학년 당시 유행하던 머리는 울프컷이었다. 말 그대로 늑대 머리인데, 앞머리와 옆머리에 비해 뒷머리가 긴 헤어스타일이다. 뒷머리가 길면 길수록 제대로 된 울프컷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당시 남자애들은 최대한 뒷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다. 어떤 녀석은 어깨까지 뒷머리를 길렀다. 앞머리는 눈썹보다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옆머리는 앞머리보단 자유롭게 기를 수 있지만 뒷머리보다 길 순 없다. 약간 헝클어진 듯한 연출을 해주면 울프컷은 완성이다.

 당시엔 학생인권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때라 두발단속이 심했다.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용모 검사를 하고, 한 달에 한번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전체 학급을 돌면서 불시에 두발 검사를 실시했다. 학샘주임의 눈을 피해 뒷머리를 기를 수 있는 배짱과 운이 필요다. 담을 넘어 다니는 것은 예삿일이고 교문에 서있는 학생주임 선생님이 뒤를 도는 타이밍을 재서 뛰어들어가는 것도 능사였다. 교문 옆 담벼락에는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학생들 여럿이 매복해있는 것이 흔한 아침 풍경이었다.

 뒷머리를 감추는 방법도 있었다. 뒷머리를 많이 기르면 양갈래로 갈라 양쪽 귀에 역(?)으로 걸 수 있게 된다. 뒷머리를 귀에 걸고 나면 뒷머리를 숨길 수 있다 믿었다. 또 뒷머리를 교복 카라 안쪽으로 집어넣어 숨겼다. 쉬는 시간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뒷모습을 가진 여러 남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있었다. 


 나 역시 울프컷에 도전하는 중딩이었다. 열심히 기른 소중한 뒷머리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비일비재한 일이었지만 당시엔 정말 속상했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당장 내일까지 머리를 잘라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미션을 부여했고, 선생님께서 추천해준 미용실이 바로 [아쿠아 미용실]이다. 학교와 가장 가까운 미용실이다. 당시 머리가 길었던 남학생들에게 아쿠아미용실은 뒷머리가 밀리는 집행 장소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곳에서 머리를 자른 학생들은 많지 않았음에도 소문은 그러했다. 그럼에도 난 뒷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속상한 마음과 반항기를 눌러 담아 미용실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자르지 않고 개길 수 있는 깜량은 없었으니까. 아마 머리를 다듬고 다음날 선생님께 검사를 잘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 미용실 손님이다. 


-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생주임 선생님은 아쿠아미용실 이모의 남편이었다고..

 



 단골처럼 특별한 인간관계도 없다. 


 단골손님과 주인장은 명확한 필요와 목적에 의해 얽혀있다. 머리를 자르러 갔고, 머리를 잘라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명확한 고객님과 사장님 사이. 하지만 그 표면적인 관계 이면에는 미묘한 의리와 유대가 자리 잡고 있다.

 먼저 우린 서로 이름을 알지 못한다. 두세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가니 1년에 5번. 10년이 넘었으니 적어도 50번은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 이름 정도는 서로 알 법도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사장님은 언제나 '이모'였고, 사장님께 나는 언제나 '아들'이었다. 아침드라마를 세 번 갈아엎을 정도로 파국인 설정이지만 우리 삶에서 이모와 아들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이모가 내 이름을 알아야 하는 상황이 생겨서 이름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한두 번 이름을 부르시는데 그만큼 어색한 적이 없었다. 다시 이모와 아들 사이로 금방 회귀했다. 이름도 까먹으셨을 거고.

 머리 커트하는 10여분 동안 정말 많은 대화를 한다. 정말 많은 정보를 공유했지만 그 정보들은 금방 휘발되고 정작 머리에 남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 일, 연애 등등. 이모한테 내가 하는 일을 자세하게 설명드린 적도 있고 두루뭉술하게 설명드린 적도 있지만 결국 이모는 날 '좋은 일'하는 복지사쯤으로 알고 있다.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난 아쿠아 이모한테는 좋은 복지사로 평생 남을 예정이다.


 10여 년 전부터 아쿠아미용실을 쭉 이용하다 보니 아빠와 남동생도 자연스럽게 아쿠아미용실 단골이 되었다. 매일 같은 곳에서 머리를 하고 오니 마치 보증수표처럼 남성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아쿠아미용실을 이용한다. 엄마는 그곳엔 가지 않으리 선언하였지만 결국 엄마도 아쿠아미용실에 다닌다. 그러다 보니 이모는 우리 가족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내 머리를 해주시면서 가족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오니 정말 우리 집 전담 미용사가 아닐 수 없다..  




 처음 이 아쿠아미용실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동병상련으로 만들어진 유대감이었다. 청소년기 아토피가 심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아토피가 있어도 밝고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러기란 정말 쉽지 않았으니까. 아쿠아미용실 이모도 아토피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아쿠아미용실에 앉아 뒷머리를 밀리기 전 내 피부 상태를 보더니 본인도 아토피가 심하다며 장갑을 끼고 커트를 해야 할 정도라고, 샴푸는 비용을 덜 받더라도 서비스하지 않는다고 수다스럽게 얘기하셨었다.

 못된 마음이지만 나만큼 아픈 사람, 나보다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당시엔 정말 큰 위로가 되더라. 당시에 나보다 아토피가 심한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피부를 보고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 괜찮냐며 친절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사실 그 관심 자체가 부담스럽고 싫었던 거라 적극적으로 괜찮은 척을 하고 다녔었다. 이모가 내 피부를 처음 보고 본인의 아픈 부위를 보여주면서 "나도 이렇다" "나는 이렇게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자체만으로 심심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아토피가 정말 많이 나아진 지금도 우리 둘의 대화 주제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토피 피부염이다. 나와 이모 모두 술을 너무 좋아해서 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어쨌든 동병상련의 유대감과 의리는 꽤 강력하다.




의리라는 것이 꽤 강력하다.


 고등학생 때 겉멋에 신경을 많이 썼을 때라 번화가에 위치한 브랜드 미용실로 외도를 한 적이 꽤 있었다. 친절하게 머리를 상담해주고 30분 동안 커트를 해주시면서 마지막에는 시원하게 머리를 감겨주시고, 제품도 멋지게 발라주는 그런 미용실 말이다. 매번 미용실 갈 때마다 "이번엔 어떤 머리를 해볼까?" 고민했다.  지금은 5:5 앞머리에 옆머리와 뒷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머리를 오래도록 고수하고 있지만 고등학생 때 내 머리는 정말 휘황찬란했다. 닭머리에, 헤어 제품을 잔뜩 발라 가르마를 만들기도 하고, 비대칭이라고 사선으로 앞머리를 자르는 커트도 했었다. 장발도 해보고 옆머리와 뒷머리를 아예 밀어버리는 투블럭 머리도 해봤다. 어떤 미용실이 솜씨가 좋은지 평가하는 것 지친 건지, 너무 친절한 서비스가 물렸던 것인지, 커트에 걸리는 시간이 아까웠던 건지 모르지만  다시 아쿠아미용실을 찾아간다.

 물론 아쿠아미용실은 유명 브랜드의 헤어숍보다야 결과물이 훌륭하진 못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감겨주지 않으시고 털어만 주신다. 이모 컨디션에 따라 머리 완성도도 달라지니 일관성도 없다. 그래도 거의 10년째 비슷한 머리만 하고 있으니 몇 년 전부터는 결과물도 만족스럽다.


 아쿠아미용실과의 의리는 나의 청소년기 얄팍한 방항기와, 그 반항기를 일으켰던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 청소년 때 교칙을 지키지 않아 이 미용실에 입문하게 되었고 청소년기 휘황찬란했던 머리를 책임져주던 곳이다. 당시 '아토피 토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가족에게도, 병원에서도 편하게 증상을 이야기하지 못했으니까. 그 당시 유대감은 익숙함이 되었고, 의리가 되었다.

 언젠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다른 미용실에 가야 했다. 오랜만에 아쿠아 이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려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정성스러운 머리가 결과물로 나왔고 나도 만족했음에도 왠지 약속을 어긴 것처럼 마음이 뒤숭숭했다.

  할머니 세대나 있을 법한 동네 미용실에 충성도 높은 단골이 여기에도 있다. 참나.




 아쿠아미용실 의자에 앉으면 이모는 언제나 같은 말투로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어떻게 할까?"


의 대답은 언제나 같다.

 "평소처럼 깔끔하게 다듬어주세요."

 

그러다 가끔 변화를 줘볼까 해서 "오늘은 앞머리를 짧게 해 보려고요.", "5:5를 하지 말아볼까 봐요."라고 말을 하면 사장님은 알겠다고 하시지만 결과물은 항상 똑같다.


머리 얘기는 이걸로 끝. 최근엔 내 두피 건강을 생각해주시느라 여러 조언을 해주신다. 그 조언들이 어느새 나에겐 생활처럼 베어든 습관이 되었고.

 


 아쿠아미용실에 가기 전에 항상 은행에 간다. ATM기에서 현금 1만 원을 뽑는다. 현금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현금을 사용하는 게 바로 아쿠아미용실이다. 아무도 정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지켜졌던 법칙이 바로 이 만원 한 장이다.


 15분 만에 커트를 마치고 계산을 할 때 여전히 쭈뼛대면서 1만 원권 한 장을 내민다. 그럼 사장님은 만원을 받아 들고 천 원 2장을 건네주신다. 5년 전까지만 해도 3장을 주셨는데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물가상승률은 반영하는데 내가 먹은 나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 뒷머리를 자르러 이 문을 열었던 녀석이 손에 쥔 1만 원 권처럼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로로 한번 접어서 사장님께 내민다. 쭈뼛거리는 건 아직도 청소년 요금을 내는 민망함이 항상 뒤통수를 때려대기 때문.



 "이모, 언제까지 청소년 요금 받으실 거예요?"

 민망함을 못 이겨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들은 계속 애로 남아야지. 결혼하면 만원 받을게."

 

 항상 만 원권 지폐를 드리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또 왠지 2천 원을 거슬러 받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기도 하다. 겨우 2천 원이지만 아쿠아미용실에서 교환되는 화폐는 유대과 의리, 시간이 쌓인 관계 그 자체다.


나는 앞으로도 충성도 높은 단골이다.


 습관처럼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 습관이 만들어지기까지 쌓인 유대감과 시간을 기억한다. 항상 그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변하지 않는 곳. 깊은 관계는 아닐지라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장소를 다시 한번 소중하게 생각해본다. 일상이 되어버린 장소에 감사를 담아 적어 내려 가는 과정이 다시 나의 일상을 지지하는 축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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