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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Oct 11. 2021

모든 그림은 자화상 아닌가?

얼룩의 그림들 _ 명화 크로키, 마트료시카

 비록 제대로 그림을 배워본 적 없고, 취미로 종종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분명 그림은 "얼룩"이라는 정체성에 가장 단단한 축을 잡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감상을  즐기고 사람들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기회를 자주 만든다. 시간이 될 때마다 전시를 찾는다. 여행을 가게 되면 가장 먼저 미술관을 위치를 확인한다. 최대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만들고자 그림과 관련된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변변치 않은 실력임에도 그림을 주제로 사람들과 소통하곤 한다. 낙서는 전혀 하지 않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백이 있을 때 그곳에 순간의 감정을 담은 그림을 그린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림 그 자체보다 그림에 담긴 를 사랑한다. 화가가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스타일을 애정하고 그 안에 담긴 서사와 맥락을 추리하는 과정을 즐긴다. 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끼는 호기심과 첫 감정을 간직하고 싶어 부러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다.  감각을 충분히 활용해 그림을 읽는 것이 목표다. 그림, 작품 너머에 서 있을 작가에게 다가가는 일일까? 아니면 그림을 통해 다시 한번 나를 마주하는 과정일까? 중요한 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궁금하고, 또 그 작품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거쳐온 무수한 시행착오와 고민의 흔적에 숙연해진다는 것이다. 이 감정은 어린아이의 그림에서도, 웹툰 작가를 꿈꾸는 청소년이 그린 그림에서도, 흰 도화지를 어떻게 채울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프로그램 참가자가 겨우 그려낸 그림에서도 느낀다. 작품과 함께 드러난 작가의 단서들을 수집하는 건 꽤나 즐거운 대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품(그림, 조각, 건축, 조형, 글 등)들에는 작가가 담긴다. 작품은 작가의 내면, 시선, 관점이 담긴 내면의 자화상이라 믿고 있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yn)의 자화상 (오르셰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직접 촬영)

 자화상 이야기를 하면 렘브란트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다. 네덜란드의 바로크 예술 부흥기 대표적인 화가였던 렘브란트는 명암법을 극적으로 활용하여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드러내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젊은 청년기에는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인기 화가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명성은 떨어졌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인기에 걸맞게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그중 단연 많은 것은 바로 본인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자화상이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작가에게 자화상은 가장 상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일 것이다. 미술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화가들은 주문제작,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먹고살았다. 작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누가 사겠는가? 아이돌도 아니고.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사실 단순할지도 모른다. 감정과 고민, 경험을 담는다.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현재를 기록고 미처 꺼내지 못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다. 물론 초상화 연습,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모델이 없어서 자화상을 그리는 경우도 허다했지만. 램브란트는 정말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의 자화상을 그려진 시간 순으로 세워놓으면 그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부유한 스타 초상화가에서 가난하고 초췌한 노인이 되기까지. 명암법을 가장 잘 활용했던 화가는 시간이 갈수록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주름이 페였고, 빛이 그림에서 사라져 갔다.

 자신을 솔직하게 그렸던 렘브란트. 그의 자화상을 보면 위대한 위인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진 사람이 보인다. 작은 방 안에서 자책하고 또 자위했을 화가 말이다.


 무엇을 표현하느냐.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 어떻게 그리느냐. 이 모든 결정은 작가가 한다(물론 사회적, 시대적 환경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자화상은 작가 본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삶과 의식이 쌓여 만들어진다. 최대한 이성을 배제하려는 일부 추상화 역시 작가의 의도와 선택의 결과물이니까. 작품을 구분하고 분리시키는 수많은 개념어가 난립해있지만 결국 모든 작품은 내면이 담긴 자화상으로 이해해보자. 그러면 비단 사조나 역사를 떠나 위대한 위인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작가들에게 인간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왼쪽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루브르 박물관, 오른쪽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 [자수를 두는 여인] 루브르 박물관, 아래 폴 세잔 [사과가 있는 정물] 오르셰 미술관 (직접 촬영

 누구나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폴 세잔의 [사과 정물]에서도 화가의 내면을 만난다. 마치 다빈치 본인을 그린 것 같은 듯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모나리자]는 그림 자체에 신화가 가득다. 비록 그 신화를 마주하기에 루브르 [모나리자] 앞은 너무 번잡스러웠지만 모나리자를 그렸을 다빈치의 의도는 그 자체로 신비롭게 남아있으니 그걸로 됐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림이다.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그림 넘버원. 뒤를 돌아보는 여성의 뒷모습과 그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은 정말 사려 깊다. 귀족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던 17세기에 평범한 사람들, 이름이 남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루브르에서 [자수를 두는 여인]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다.

 폴 세잔은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사과가 그의 주요한 오브제였다. 심지어 초상화 모델에게 "나는 사람보다 사과가 좋다. 사과는 움직이지 않으니까."라고 말했을 정도로 유별나게 사람과 관계를 잘 맺지 못했던 세잔은 그의 그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람을 그린 초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생기(혹은 애정)는 오히려 사과에서 느껴진다.


순서대로 모나리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사과 정물 / 우드박스에 오일파스텔 2021.09.04.


 쓸모를 잃고 나뒹구는 작은 나무 상자가 책상 위에 있었다. 또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손에 묻지 않는 어린이 5색 크래용을 꺼냈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해보다 내 머릿속 신화로 자리 잡고 있는 명징한 3개의 오브제를 그린다. 모나리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리고 세잔의 사과. 작품을 보지 않고 쓱쓱. 크로키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빠르게 그려냈다. 오마쥬라고 하기에 별생각 없이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고, 또 모방이라기에 숨길 수 없는 내 흔적들이 가득이다. 또 결과물이라기에 들어간 노력이나 열정이 극히 적다. 그럼에도 크래용을 문댄 그 자리에 남아있는 작가들의 유산과 나의 흔적들이 얽혀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분명 오브제는 작가들의 것인데, 그 안에는 내가 담겨있다.

 

"내면 자화상" 마트료시카 세트에 아크릴 2021.08.02.

   

 마트료시카는 러시아 인형이라고도 불리는데,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들이 5~6개 들어있다. 최근에는 미술 수업 도구로 많이 쓰이기도 해서 나무 목재로 형태만 잡아놓은 DIY 키트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5천 원에서 1만 원 이내로. 청소년들과 비대면 미술 프로젝트 도구로 마트료시카를 구매해서 그림 활동을 진행했다. 마트료시카는 하나의 본체 안에 복제품이 저장되어있는 형태이니, 자신의 내면을 한 걸음씩 들어가는 작업이랄까. 이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큰 오브제 안에 작은 오브제들이 연속된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 같은 이미지를 그리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마치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를 형상화한 듯한 장난감이다. 가장 작은 녀석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자화상을 그렸다. 병아리에서, 태아로, 또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로 이어지는 마트료시카. 그림이 나랑 닮았는지는 절대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내 감정은 담겼으면 했다. 복제되는 마트료시카 하나하나가 감정이 담기는 그릇으로 그림이 남아있기를.

 

 앞서 이야기했듯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작가를 이해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말 잘 그렸다"는 말은 그저 그렇지만 "얼룩이 그린 그림답다."라고 말해준다면 목표 달성이랄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이해하고, 또 그림으로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 그림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사려 깊은 마음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작품은 어떤 과정을 겪어 이미지화되었는지 묻는다. 굳이 정답이 아니어도 괜찮더라. 그 질문은 결국 고스란히 관객인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되었으니. 왜 이 그림을 그렇게 해석하는지. 이 화가의 삶에서 어떤 부분에 감동하고 공감했는지. 화가가 남긴 흔적(의도)들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그림에 담긴 작가와 관객의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그림 속에 묻어있는 작가의 흔적을 읽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이 그림을 재밌게 보는 팁이다. 작품에서 정보를 찾기 전에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길래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 사람에 대 궁금증을 키워보자.


데이비드 자민의 내면 자화상 시리즈. 2020 서울 한가람미술관 DAVID JAMIN 展


데이비즈 자민은 자화상을 그린다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담은 자화상. 부러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관객인 나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내면과 나의 내면에 맞닿아있는 공감대를 발견했다. 내면 자화상이라는 시리즈가 비단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사람의 그림에 녹아들어있는 하나의 공통분모로 이해해본다. 작가가 포착하는 이미지, 구현하고자 하는 오브제, 그의 표현까지도 모두 작가의 경험과 고민이 담겨있는 것이니. 모든 그림은 자화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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