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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Sep 14. 2021

18년 살았던 집에서 '진짜' 떠납니다.

[그-곳] 은하수 아파트

 초등학교 4학년. 10살부터 살았던 집이었다. 18년을 살았다. 무려.  

 


 언젠가 엄마랑 술 한 잔 마시면서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잠시 머물 요량으로 의정부에 왔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살다 보니 의정부는 꽤 괜찮은 곳이었고, 집도 5인 가족이 살기에 했다. 은하수 아파트를 지을 당시에는 의정부에서 가장 넓고 좋은 아파트였다고 한다. (지역에 오래 사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집 이야기가 나오면 "좋은 집 사네~"라고 농담을 곧잘 듣는다.) 지금도 의정부에 있는 아파트들 중 넓은 축에 속하면서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장날이 이 집의 최고 장점이다. 18년 동안 매주 금요일은 아파트 장에서 분식을 먹거나 야식을 사서 가족들끼리 나눠먹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매주 금요일마다 순대를 사 왔다.


 이 아파트는 은하수라고 불린다. 좌측 100라인과 200라인 두 건축 회사가 달라 명칭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린 그냥 다 통틀어서 은하수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공간 활용 때문에 날개형 아파트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데, 은하수는 가운데 도로를 척추로 옆으로 뻗은 갈비뼈 모양을 하고 있어 단순하다. 내가 살았던 집은 15층이다. 가장 높은 층이 16층이었으니 난 은하수 맨 위에 살았다. 우리 15층 집의 매력은 탁 트인 전망이었다. 수락산 자락이 보인다. 그리고 내가 다녔던 신곡초등학교도 보인다. 수락산 반대편으로 가면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있는 놀이터와 아파트 단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집은 망루처럼 은하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땐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창문에 한참을 눌러앉아 바깥 풍경을 즐겼다. 놀이터에서 노는 친구들, 금요일 장날 돌아다니는 사람들, 자전거로 단지를 휘젓는 녀석들까지.

 불과 얼마 후 동네를 시끄럽게 떠드는 놈이 바로 내가 되었더랬지. 친구들과 나는 항상 은하수 단지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에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면서 놀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무지 알 순 없지만 분명 별거 아닌 걸로 몇 시간은 웃었던 것 같다. 그 누구도 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버드"라고 부르는 작은 단지 내 공원에서 농구도 열심히 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았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할머니 5인 가구였다. 우 옆 동에는 엄마의 친정 가족이 자리를 잡다. 주말에는 외할머니댁에 가서 밥을 먹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명절마다 우리 집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두 할머니(할아버지)가 모두 지근거리에 살고 계시니 명절은 항상 은하수 안에서 벌어졌다. 명절 전날 외할머니댁에 가서 녹두전 거리를 받아왔다. 설날에는 빨리 집에서 세배를 마치고 옆집으로 달려가 세배를 했다. 


 돌아보자면, "기억난다"라고 할만한 추억을 쌓은 것들은 모두 이 집에 살고 있을 당시였다. 10살부터 29살까지 살았으니 '나'라는 사람이 조각되는 모든 시간이 켜켜이 쌓 곳이다. 그 이전의 기억은 부모의 회상에 의존할 뿐, 나의 시간은 이 집에 머무른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이 집에서 졸업했다. 대학 때는 자취도 하고 군대에도 다녀왔지만 결국 졸업은 집에 살면했다.

 10대의 고민과 불안을 방 안에 구겨담아놓고, 반항기를 가득 담아 집 앞 소화전에 숨겼다.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는 날 집에 친구 열댓 명을 불러 거하게 파티를 벌인 날도 있었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10대의 거짓말과 전시성 자아가 판을 쳤던 집이다.

 이 불안한 자아가 자리를 조금씩 잡아가는 과정도 은하수와 함께였다. 나를 이해하고 무엇을 잘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곳이었고 치열한 현장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10살의 내가 지금의 나로 이어진 온갖 흔적과 경험 담겨있다. 비록 그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있지만 여전히 나의 삶을 보관하는 중이다.

 




 조금 늦었지만 이 집과 이별한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로망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집을 짓고 노년을 보내는 것. 중년의 다소 뻔한 바람이었으나 그것을 이루면서 그들의 꿈은 특별해졌다. 18년 살았던 집을 떠나 20년, 30년 살 집을 지었다. 외할머니 가족은 10년 전, 우리 가족을 따라 옆 아파트 라인으로 이사 오셨다. 이번에는 나의 부모가 그들의 부모를 따라간다. 준공은 1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는데, 이사는 너무나 눈 깜짝할 새 이뤄졌다. 은하수와 지근거리에서 홀로 살고 있는 난 바쁜 일상을 핑계로 이사하는 과정을 소식으로 접했다. 이삿짐이 옮겨지고 바로 은하수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리모델링을 할 예정이라 들었다. 새로 이사 온 분들은 우리가 18년 동안 살면서 꾸며놓은 공간이 썩 마음에 들어 빨리 들어오고 싶었다나. 이제 그곳을 찾아가도 기억 은하수는 없다.


 이사한 날, 나는 새로운 집으로 갔다. 이제부터 '우리 집'이라 불릴 집으로. 짐들을 치우고 옷, 잡동사니 정리를 했다. 어차피 이사한 집이 완공 상태가 아니 부모님은 할머니 댁에 머물면서 차근차근 둥지를 틀 예정이다. 새로운 우리 집은 가족 모두가 함께 구상한 집이니 정말 마음에 든다. 주말마다 새 집에서 누리게 될 호사를 상상하면서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가 끝나고 2~3주간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집은 삶을 담은 그릇이다. 나의 10대와 20대가 온전히 담길 수 있었던 집이 나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하고 있다. 내 삶이 비교적 온전하게 그 공간 안에 남아있어 다행이다. 작은 그릇 하나 깨지는 것도 가슴 아픈데, 내 삶이 담 집이 한순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사실은 정말 허무하. 헛헛하고, 공허하더라.


 은하수는 내가 기억하는 집의 전부였다. 그동안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친구들과 살았던 집, 자취방 등등 살면서 6개 이상의 집에 살아봤지만 집이라는 온전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은하수였다. 가족, 못난 과거, 아픈 기억, 행복했던 추억, 변화 모두 담겨있는데 그 기억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이사를 치렀다. 물리적인 집에 담긴 기억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듯 불안했다.

 집과 이별한다니. 처음으로 경험하는 집과의 이별이 마치 애인과 이별하듯, 우정에 끝을 맺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은하수 15층에 있던 40여 평의 물리적인 공간은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인처럼 내 머리에 맴돌고 있다. 물리적 공간은 흘려보낸 시간처럼 내 주변에 흐르고 있다. 그 집 안에 있던 작은 나의 방은 마치 몸에 남은 흉터처럼, 나이테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물리적 공간을 심상으로 전환하는, 기억 속에 커다란 부지를 분양하는 시간과 계기가 필요했다.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도 그 전환을 이루는 과정이 되기를.




 은하수라는 공간에는 할머니가 담겨있다.


 2021년. 나는 인생을 흔드는 두 가지 이별을 경험한다. 평생을 함께 했던 할머니가 떠났고, 난 평생을 살았던 집을 떠난다. 이 두 이별은 집을 떠나면서 하나의 이별처럼 뒤섞였다. 할머니는 내가 가장 나약한 모습을, 못된 모습을, 꾸며지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앙큼한 반항과 수치가 펼쳐진 곳이 은하수 집이었다.


 항상 내 끼니를 걱정했다. 끼니 이후엔 잘 먹지도 않는 과일을 몰래 깎아다가 책상 위에 올려놨다. 가족들이 들어올 시간에는 항상 베란다에 나가 창문으로 언제 오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내가 집에 올 때도 항상 그렇게 베란다에 서 있었겠지. 불교인지, 민간신앙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가족의 무운을 항상 빌었다. 조상을 모시는 날에는 그들 명패 앞에 30분이나 모든 가족들의 안녕을 부탁했다. 나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그에게 온갖 짜증을 냈었다. 왜 본인은 안 먹고 나를 챙기는지, 감사한 줄 모르는 바보 같은 화를 매번 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나를 챙겼다.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보기 시작한 건 그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내가 20대가 되면서부터다.

 치매가 심해지던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시간이 지나자 내가 지나가는 곳에서 마주친 주민들이 할머니 안부를 물었다. 경비아저씨도, 옆집 아저씨도, 아랫집, 윗집 다 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왜 요즘 안 보이시냐고. 어디 안 좋으시냐고. 오지랖 넓었던 그는 모든 동네를 주름잡던 친절한 대장님이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내 삶에 얼마나 많이 담겨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순대를 사 왔다. 난 채식을 시작하기 전 순대를 가장 좋아했는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이 취향도 할머니 말미암아 자리 잡은 거였다.


집과 이별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이 할머니를 기억하는 촉매가 되기를. 그가 아름다운 어린시절을 나에게 선사하였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난 은하수를 기억 속에 분양한다.

 



 

은하수가 사라진 것은 본격적인 홀로 서기의 시작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익숙했던 습관을 버린다. 은하수 높은 곳에 위치해있던 18년의 시간과도 이별이다. 대신 할머니의 헌신과 사랑이 그리울 때, 찾아갈 마음속 공간을 만들고 있다. 10대와 20대의 경험과 깨달음이 필요할 때 두드릴 문을 만들고 있다. 가끔 추억 여행을 떠나고 싶을때 뒤적거릴 창고가 지어지고 있다.


나는 18년 동안이나 살았던 그곳을 떠나는 중이다. (하진 못하지만)

할머니의 방


 공간과의 이별은 그 공간에 묶여있는 특별한 관계의 상실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을 심상 속 공간으로 전환하는 작업 역시 사람과의 추억과 관계를 골조로 다시 집을 짓는 작업이다. 분명 우린 살면서 이별한 사람을, 추억을 찾아 헤맬 시점을 만난다. 내가 찾을 때까지 그들이 기억 속에 머물 수 있는 집은 필요하니까. 언제든지 찾아가 삶을 위로받을, 추억을 회상할 '그-곳'을 만든다. 잊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이 자리 잡을 '그-곳'을 지어놓으려 한다. 이 글을 쓰는 행위가 심상 속 집을 짓는 작업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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