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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마케터 Oct 11. 2023

폭력, 극복 가능하나요?

사랑받음으로써 잊는다

오늘 오랜만에 나의 브런치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온라인 공간이라는 용기를 얻어 나의 아픔을 끄집어 내놨었구나. 그러고 나는 다시 끄집어낸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잊고 싶은 기억들, 드러냄조차 잊고 싶었나 보다. 



극복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지난 글들을 읽어보니 어쩌면 '희미해졌다'는 표현이 이미 내겐 '극복'과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 아픈 기억들을 어떻게 잊어냈을까.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내게 환히 웃어주는 내 베프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일로써 좌충우돌하던 나 자신을 극복하고 싶어 일도 열심히 했다. 어쩌면 이 많은 것들이 나를 '밝은 척하는' 아니 진짜 '밝아진'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의 어두움이었다


그때,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자주 엄마는 내게 "너는 왜 이렇게 애가 우울하니"라고 했다. 내가 왜 우울했는지는 엄마는 알지 못했다.


내 몸은 여기저기 멍 투성이었고 어느 때엔 몸 어느 곳이 너무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일상이 행복했을 리 없다. 


마음이 아팠을까, 몸이 아팠을까. 어디가 아픈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어딘가 늘 아팠고 그 몸으로 죽도록 일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엄마의 희귀병


그렇게 어둠과 사투를 하고 있을 즈음 엄마는 아팠다. 하혈을 하고 쓰러지기를 몇 번, 그 과정에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도 생겼다.


내가 자라온 모든 순간 엄마는 연약하고 예민했다. 엄마가 아플 즈음 가족들은 모두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게 일상이 됐던 거 같다.


엄마의 아픔이 무덤덤해질 즈음 엄마가 쓰러졌다. 큰 병원을 옮기며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병명을 확인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그때 하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주 맞았고 자주 다쳤고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엄마와 자주 마주치기를 거부했었다.




엄마가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의 하혈은 계속됐다. 심지어 병실에 누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제야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고 나는 나약하기만 했다. 엄마를 지켜줄 힘이 내겐 전혀 없었다. 아니, 엄마를 지켜주기는커녕 나 혼자 서있기조차 버거웠으니.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그 과정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기에. 그때의 나를 엄마는 두고두고 원망했고 최근에서야 내가 그때 어떤 상황인지 설명할 수 있었다.


엄마는 수년간 원망했던 마음을 거뒀다. 그리고 같이 울었다. 우리는 모두가 아팠다.




죽도록 살았다


이제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었다. 어느 때고 엄마, 아빠가 아프면 내가 지켜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30대가 훌쩍 넘어간 때였다.


뒤늦게 철이 든 막내딸은 정말 죽도록 일했다. 그것이 내가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곁에 남아준 이들도 꽤 많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꽤 사랑받으며 살았다. 그 사랑을 밀어내고 거부하기도 했지만 나는 사랑받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내가 멍청했던 모든 순간에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 곁을 지켜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 꽤 많이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아고 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나아가고 있음으로 느낀다. 그걸로 됐다.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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