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점심시간이 막 지난 즈음 지하철 2호선은 번잡하지 않았다. J와 내가 의자 바로 앞에 자리를 잡는 것도 수월했다. 물론 금방 의자가 빌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문이 열릴 때마다 끊임없이 이리저리 휩쓸리고싶지 않았을 뿐이다.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지만 선 채로 노트북을 펼 수는 없기에 마음을 비우고 J와 이야기를 나누며 두 정거장 지날 때쯤 바로 앞 의자 두 자리가 비었다. 잽싸게 앉아 서둘러 노트북을 꺼내 빠른 손놀림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두 세 정거장 지났을까.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쯤 왔는지 궁금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빨간 사파리를 입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의자 앞에 서있는 사람들 틈으로 빈자리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셨는데 행동이 조금 굼떠보였다.
'다리가 불편하신가..?'
자리를 내어드릴까 싶어 조금더 지켜보니 손잡은 일행이 있어 행동이 재빠를 수가 없다는 걸 알게됐다. 일행은 나이대로 보아 딸이나 손녀쯤 될까. 이 분은 확실히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빨간 사파리를 입은 분은 일행을 앉아가게 하기 위해 의자를 찾고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의자자리는 이미 가득 차 있었고 그 바로 앞에도 사람들이 서있어 그분들이 앉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노약자석마저 빈 자리가 없어 운이 따르지 않는 한 목적지까지 서서가야할 수도 있었다. 다음 역에서 또 그 다음 역에서 빈 자리가 생긴다한들 의자를 향한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재빠른 몸놀림을 당해낼 수도 없을 터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 분들은 이미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쪽도 자리가 없긴 마찬가진데. 그렇다고 조용한 전철 안에서 여기 앉으시라고 소리쳐불러 주목받고싶진 않았다.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손짓으로 바로 알려주려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그 분들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봐주길 더 기다리다간 다른 칸으로 가버릴 수도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노트북을 내 자리에 두고 사람들을 헤치고 그분들 곁으로 갔다.
"저 자리에 앉으세요."
손짓으로 노트북을 두고 온 의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그분들은 다시 방향을 틀어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무사히 내가 맡아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눈치 빠른 J도 두 분이 모두 앉을 수 있게 자리를 양보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보느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리를 양보하고싶지 않은게 아니라 휴대폰 삼매경이라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양보하고싶어도 자신의 삶이 너무 고단하여 눈을 감았을 수도 있다. 예전의 나처럼.
J와 나는 처음 전철을 탔을 때처럼 의자 앞에 함께 나란히 서서 갔다. 그리고 운 좋게 또 금방 자리에 앉아 다시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릴 때 보니 우리가 자리를 양보해드린 그 자리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목적지까지 앉아서 가신 모양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