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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l 20. 2021

책의 밀도

읽는 직업 / 이은혜


#독서일기

기록한지 수 년. 독자의 자리가 공기처럼 사라져버릴까 두려워서. 기억의 힘은 유전자처럼 모두 달라 평범을 넘지 못하는 나 같은 독서가는 애를 써야 한다. 책장을 덮자마자 밥을 하러 가는 탓에 감동을 누릴 시간조차 때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독서노트

두 권이 지난 한 해 기록. 필사와 감상을 메모한다. 오감을 동원해 그림자라도 붙잡아 창고에 저장하려는 몸부림이다. 눈으로 읽고 머리를 쥐어짜고 가슴도 울리지만 시간은 책의 기억도 첫사랑의 모습처럼 흐릿하게 만든다. 라이딩을 하면 허벅지 근육부심이라도 생기는데.


#북클럽

참여는 독자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몇 군데 발을 들여놓아봤는데 지금은 가족같은 마음으로 두 어곳의 출판사와 교제 중. 수시로 신간을 들여다보고 리뷰. 편집자들과 만나며 저자를 깊게 알게 되고 독자의 농도가 짙어졌다.


#편집자

책의 세계를 들려주었다. 저자와 독자의 거리를 좁혀주는 조력자의 녹녹치않은 직업풍경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출판계에 잠시 일하던 경험이 있어 쉽게 몰입. 독자의 손에 쥐어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삶 아래에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열 권이 되었을 책들이 숨어있다. 단지 책 만이 아닌 저자의 삶일 수 밖에 없는 노고의 열매. 그 열매를 솎아내고 포장하는 <읽는 직업>. 스스로 저자가 되어 책에 담았다. 한 장을 마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 먹먹한 마음이 되어 숨을 고르기도 했다. 쉽게 읽어내려가는 책은 아니다. 직업에 대한 깊은 성찰들로 촘촘하다.


#저자

쓰는 세계를 탐하지만 독자의 자리가 편하다. 지적평민으로 읽는 자리는 안전하다. 저자를 만들어 낸 편집자의 의도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독자라는 트라이앵글의 한 모서리는 가장 빛나는 꼭대기가 될 수 있다. <쓰는 직업>과 <만드는 직업>이 무대를 깔아준 덕분이다. 독자가 <읽는 직업>이 될 수 있으려면 책이라는 세계를 겸손하게 받아낼 성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책읽지않는시대

지식의 숲으로 난 길이 좁아진다. 걷는 자들의 흔적으로 난 그 길을 걷다보면 가끔 외롭다. 숲 속에서 외롭게 울부짖는 늑대처럼 SNS에 올려본다. 가끔 다른 동네 늑대들이 이 곳  저 곳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신호한다. 편집자인 저자의 한 글을 옮겨 내 기억에 진하게 저장하고 싶다.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과 달리 작은 길을 내는 이들의 목소리는 다정하다. 책을 쓰거나 읽거나 만드는 이들은 이처럼 부의 세계에서 한 발 떨어져 나와 자신들만의 빽빽한 밀림을 만들어간다. 그 밀도가 일상을 구성할 때 편집자(독자)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말한 '이 땅 위에서의 저렴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사하면서 가지고 있는 책의 절반을 처분했다. 이제 천 권이 안된다. 우리 곁을 떠난 책들이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책을 떠나보낼 때 입학을 앞두고 졸업해야 하는 심정이었다.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야 하니까. 이별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져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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