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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smelo Oct 11. 2024

식물적 생명력의 역동성과 원초성

한강 <채식주의자> 서평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는 3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다. 이들 소설은 각각 단편으로서 완결성이 있지만, 등장인물이 동일하고 내용적으로 서로 이어진다. 


주인공 영혜가 어떤 계기로 완전한 '채식'에 돌입하는데, 그 이후 점차 영혜는 (세속의 관점에서) 완전히 일탈해버린다. <채식주의자>는 그 초기의 과정을 영혜의 남편 관점에서 그린다.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 관점에서 그린다.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관점에서 그린다. 이 세 가지 이야기와 관점이 서로 맞물리고 얽히며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이 만들어진다. 


소설이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생명'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러 암묵적 합의에 기반하고 있는데, 가령 가족제도, 경제제도, 관습,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그렇다. 


이러한 합의 속에서 우리가 가진 '생명'은 정말 생명다운가. 가족구성원으로서 서로 지켜야 할 윤리, 경제적 역할을 해야 할 주체로서 지켜야 할 윤리, 관습적 윤리, 커뮤니케이션적 윤리(지금까지 쓴 '윤리'는 '관행'으로 바꾸어 써도 크게 무리되진 않을 것 같다)가 우리의 생명과 몸을 동물적 또는 사물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다. 즉 육화(肉化)시키고 있거나, 물화(物化)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영혜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어서, 그 목숨들이 명치에 걸려 있다. 고기의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그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섭취한 이의 명치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가슴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의 손도, 발도, 세치 혀도, 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지만 젖가슴만은 아무도 죽일 수 없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영혜가 '생명'으로서 '생명'을 향해 지키고자 하는 일종의 예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실천을 사회 구성원들은 죄다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여성 주체는 부끄럽게 여기며, 남성 주체는 엉뚱한 신호로 해석한다. 


육화의 욕망, 물화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지극히 '식물적'이다. 그러나 식물적이라고 해서 생명력이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원초적이고 역동적인데, 그것은 영혜의 둔부에 남겨진 '몽고반점'이라는 상징을 통해, 그리고 그 몽고반점의 생명력을 극대화하는 '꽃 그림'이라는 상징을 통해 극대화된다. 


소설에는 자신의 식물적 생명력을 극대화한 두 등장인물이 나온다. 영혜와 형부다. 그들은 육화되고 물화된 욕망을 거세한 상태에서 교합한다. 욕망의 거세가 전제됐기에 가능한 교합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격렬하다. 육화된 욕망, 물화된 욕망을 끝내 거세하지 못한 J와 영혜의 교합이 실패한 것과 대비된다. 


'몽고반점'만으로는 식물적 생명력의 열정과 역동성, 원초성을 담아내기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한강은 <나무 불꽃>이라는 한 편의 단편을 더해 그것을 역설한다. '모두 형제같은' 세상의 나무들, 그저 소극적으로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라 두 팔로 땅을 받친 채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인 세상의 나무들,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에 대한 경험과 묘사가 그렇다. 


그렇게 식물적 생명력을 대표하는 영혜와, 그를 다시 육화 및 물화된 욕망의 인간세계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언니는 그 식물적 생명력의 역동성과 원초성을 확인하는 지점에서 화해의 접접을 찾는다. 화해 이후의 세계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둔다.


러프하게 이해한 <채식주의자>의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강력한 흡입력이 있지만, 읽어가면서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는 작품이다.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의 힘에 눌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징이 많기 때문에 이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해석하기가 버거워지는 지점에서부터 그렇다. '서사의 부족'을 '상징의 과잉'으로 커버하려 한 작품이랄까? 


하지만 어떻게든 그 상징을 자신의 메시지로 해석하고 나면 그것이 전해주는 울림은 강하다. 그 울림이 개운하지 않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문학스럽다.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은 한국 소설 중의 하나다. 대학생 이후 가장 독서력이 좋았던 때에 읽었던 작품이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노벨문학상 소식에, 몇 년 전 썼던 글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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