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혁신시스템(NIS: National Innovation System)은 1980년대 이후 발전한 개념으로 대학, 연구기관, 기업, 정부/공공기관 등 액터(actor)가 상호작용을 통해 국가를 발전시키는 혁신생태계를 가리킨다(<그림 9-1> 참조). NIS는 혁신 주체인 액터 외에 혁신 인프라(: 투자, 지식재산권, 혁신/사업화 지원, 표준화 등)와 혁신 촉진요소(: 재정지원, 세금 감면, 혁신/창업 촉진, 이동성 보장 등)를 포함한다. 1990년대 이후 기업 내/외부 거래와 협업을 위한 전자(상)거래, 정부/공공기관의 내부 통합과 외부 서비스를 위한 전자정부 등 디지털 시스템이 NIS를 뒷받침한 셈이다.
<그림 9-1> National Innovation System(출처: Kuhlman & Arnold, 2001)
디지털 시대의 NIS는 개념적으로는 8장에서 소개한 디지털 국가(Digital Nation) 또는 스마트 국가(Smart Nation)의 혁신생태계라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나 싱가포르, 우리나라 등이 추구하는 디지털 국가의 궁극적 목표는 정부, 기업, 그리고 국민을 위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국가 혁신생태계의 거버넌스는 정부가 이끌어가는 수직적 거버넌스가 아니라 산학연을 포함하는 민간의 다양한 액터들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협업적 거버넌스가 바람직하다. 기술 구조는 ① 액터별 혁신 활동과 일상업무를 지원하는 디지털 교육/R&D, 디지털 경제(예: 상품의 생산-유통, 글로벌 교역), 디지털 사회(예: 가치 공유/분배, 포용), 디지털 정부 등을 각각 지원하는 수직적(vertical) 시스템과 ② 모든 액터를 공통적으로 지원하는 수평적(horizontal) 시스템으로 구성될 것이다. 수평적 시스템은 NIS의 인프라에 해당하는 금융기관, 투자자, 특허/정보 관리, 혁신/사업관리, 표준화 등에 대한 지원 기능과 모든 액터를 위한 공통 서비스를 포함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 국가의 효용성은, 예를 들면, 이용자인 국민이 느끼는 편의성과 만족도로, 효과성은 액터별 활동 성과가 국가 차원에서 통합되는 수준으로, 그리고 효율성은 투입된 자원의 중복을 배제하고 낭비 요소를 최소화한 것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토니아나 싱가포르 사례에 의하면 디지털 국가의 주요성공요인(CSF: Critical Success Factor)은 첫째, 기술 측면에서는 이질성 & 다양성을 가진 여러 애플리케이션/서비스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는 플랫폼 계층의 우수성과 둘째, 경영관리 측면에서는 여러 이해관계자가 공진화(共進化)하는 플랫폼 생태계의 건전성이라 할 수 있다.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은 서로 다른 기술로 구현된 모듈들이 원활한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플랫폼 생태계의 건전성은 다양한 멤버가 참여해서 경제적, 사회적 성과를 높이고 그 결과가 공정하게 분배될 때 확보될 수 있다.
O’Reilly는 플랫폼 정부(GaaP: Government as a Platform)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려면 웹이나 아이폰 등 컴퓨터 플랫폼의 성공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O’Reilly, 2010). 개방형 표준을 통해 상호운용성을 보장함으로써 혁신과 성장을 촉발하고, 단순한 시스템을 먼저 구축한 다음 이를 점차 발전시키며(즉, 진화적 개발), (리눅스처럼) 다수 개발자가 참여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내부에서 개발한 초기 시스템을 외부의 '해커'가 개선-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즉, 내/외부 연결/협업), 사용자의 데이터 기반 피드백을 공동창조에 활용하고(즉, 집단지성 활용), 반복적 실험을 통해 성공에 이르는 방식(즉, 애자일 방식)을 적용하며, 기존 시스템의 개선보다는 유용한 새로운 시스템을 실제 사례로 보여주어야(즉, Learn by Example)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 ‘플랫폼’은 디지털 시스템의 공통구성품인 디지털 플랫폼뿐만 아니라 PC,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인프라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용어라는 점이다. O’Reilly는 플랫폼 기반 전자정부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기술 및 관리 측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지만, 이는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디지털 국가 건설에서도 똑같이 귀중한 지침이다.
선도국가의 사례나 전문가의 조언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디지털 국가가 성공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결국 개방-연결-협업을 통해 공동창조를 실현함으로써 혁신과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다. 플랫폼은 여러 제품/서비스가 공동 활용하는 구성품이기에 개인, 기업, 정부/공공기관 등 이를 공유하는 이해관계자가 많아질수록 국가 차원의 효율성, 효과성, 효용성을 높일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이유로 디지털 정부, 플랫폼 정부, 스마트 국가 등을 구현하려는 국가들은 한결같이 플랫폼 구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왔다. 에스토니아의 X-Road와 싱가포르의 CODEX는 이미 그 유효성이 입증된 상태이고 EU/독일의 GAIA-X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개발 및 시험적용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비슷한 문제 인식에서 국내 일부 연구자도 민관 협력을 통한 국가 차원 플랫폼 구축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故 이민화(2017)는 산업별(예: 자동차, 조선, 의료, 유통)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들을 국가 차원의 산업플랫폼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민간의 산업플랫폼에 공공데이터 플랫폼을 합쳐서 ‘버추얼 코리아 플랫폼’(가칭 ‘K-로드’)을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은경(2018)은 전체 산업을 포괄하는 국가 차원의 통합 플랫폼을 ‘산업융합 플랫폼’으로 정의하고 이는 기술보다는 법/제도 개선을 통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산업융합’은 전통산업은 물론 여러 가지 융합(신)산업을 대상으로 하기에 HW나 SW를 포함한 기술요소뿐만 아니라 제도와 문화, 가치 측정/평가의 차이를 조정, 통합하는 관리요소도 융합 대상이다. ‘기술요소의 융합’은 이질적인 데이터를 공유하고 프로세스를 연동하는 개방형 플랫폼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관리요소의 융합’은 물리적/화학적 결합을 거쳐 하나로 통일(unification)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과 절충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그 결과는 최선(best)이 아닌 차선(second best)이 될 수도 있다. 국내 연구진의 연구 결과는 문제 제기 또는 개념모형을 제시한 수준이기에 이를 논리모형으로 구체화해서 실제 정책/사업에 반영하는 작업이 필요한 상태이다.
핀란드는 지난 장에서 소개한 에스토니아와 싱가포르 못지 않게 디지털 경제 시대를 지혜롭게 맞기 위한 국가 정책을 수립,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2017년에 발표한 ‘국가 AI 전략’(MEAE, 2017)은 자국의 기술 및 자원 수준을 감안, 기술개발에 주력하기보다는 AI를 세계에서 가장 잘 활용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그 전략은 전 국민의 1%(약 55만명)를 AI 활용 전문가로 육성한다는 세부 목표를 포함하고 있다. 2018년에는 AI와 플랫폼 경제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디지털 경제 전략의 일환으로 ‘Digital Finland Framework’(MEAE/BF/VTT, 2018)라는 정책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전 세계 메가트렌드에 대응할 수 있는 핀란드의 강/약점 분석 결과와 새로운 국가 발전 목표 및 실현 전략을 담고 있다. 위 보고서에 제시된 ‘핀란드 국가 발전 목표’는 ① 산업 재편성(: 국민 복지와 경제 성장 기회 포착), ② 기후변화 대응(: 청정 에너지와 친환경 수송에 주력), ③ 건강한 삶(: 신기술을 활용한 삶의 질 개선), ④ 자원 공급 확대(: 새로운 자원 확보 & 낭비 제거), ⑤ 안전 및 보안(: 개인, 정부, 기업, 인프라 등의 물리적/사이버 보안) 등이다. ‘전략적 접근방안’으로 ① 디지털화된 산업 플랫폼/생태계 구축, ② AI를 포함한 신기술의 신속 & 간편한 산업 적용, ③ 미래가 요구하는 디지털 역량 확보(: 교육훈련, 산학연 협업, 기술이전 포함), ④ 디지털 전환을 위한 공공 투자 확보(: 민간과 공공이 GDP의 4% 투자-2030 비전), ⑤ 디지털 혁신을 위한 전방위 국제 협력 등이 제시되었다.
위 문서에 포함된 ‘디지털 핀란드 프레임워크’는 정부,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플랫폼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개념적으로 도식화한 것이다(<그림 9-2> 참조, 위-아래로 연결된 원본 그림을 편의상 좌-우로 연결된 3개 조각으로 나눈 것임).
<그림 9-2> 디지털 핀란드 프레임워크 (출처: MEAE/BF/VTT, 2018)
<표 9-1> 핀란드의 국가 차원 플랫폼 생태계 구현 전략
<표 9-1>은 <그림 9-2>를 필자가 표로 정리한 것으로 위 보고서에는 명확한 설명이 없는 부분을 필자가 추정해서 더 채우고 정책 개발로부터 실행에 이르는 ‘단계’ 개념을 추가한 것이다. 이 프레임워크를 통해 국가 차원 디지털 경제 구축을 위한 정책 개발로부터 기술 개발, 역량 개발, 산업 적용으로 이어지는 시험개발 단계와 플랫폼 상품 개발, 생태계 구축, 비즈니스 수행에 이르는 전면개발-적용 단계를 반복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국가 차원의 플랫폼 서비스를 구축하고 이를 활용해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전략을 정부 단독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산학연 협력, 나아가 국제협력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또한, 전면 적용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은 기존 정책 개선이나 새로운 정책 개발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기술 개발’은 여러 가지 기술을 성숙 단계와 기대효과를 감안해서 전략적으로 조합, 활용하고 ‘역량 개발’은 기술뿐만 아니라 시스템(예; 새로운 제품/서비스와 관련 제도), 나아가 정부/기업의 전략 수립-실행 역량까지 포함한다. 기술 성숙도나 효과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특정 기술에 ‘올인’하는 것은 국가든 기업이든 무모한 전략이다. 디지털 경제나 디지털 국가 구현에서 ‘기술’은 필요조건이며 수단일 뿐, 기술이 적용될 ‘시스템’에 대한 고려와 올바른 수단을 선택하는 ‘전략’이 미흡하다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플랫폼 경제가 발전하고 소수의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급성장하는 동안 주요 국가 정부는 플랫폼 생태계에 대해 조금씩 다른 정책을 펼쳐왔다. 모든 정부가 플랫폼 기술 발전에 투자하고 불공정 경쟁/거래를 규제해서 산업경제 측면의 질서를 유지해서 일반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려 한 것은 공통적이지만, 규제/촉진 대상이나 강도는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글로벌 시장에서 독/과점 수준의 지배력을 가진 플랫폼 기업을 다수 보유한 미국은 기업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반면, 지배력을 가진 플랫폼 기업이 거의 없는 EU는 자국 시장, 기업과 국민의 권익 보호를 목표로 개인정보보호법(GDPR, 2018년 시행), 디지털시장법(DMA: Digital Market Act, 2023년 시행), 디지털서비스법(DSA: Digital Service Act, 2024년 시행) 같은 법/제도를 만들어서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을 규제해 왔다. EU는 또한, 독일이 2019년부터 자체 개발하기 시작한 GAIA-X 플랫폼을 기반으로 영향력 있는 제품과 기업을 육성하고 지역 시장/소비자를 보호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자국 플랫폼 기업(예: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화웨이)이 국내 시장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고 있기에 글로벌 기업에 대한 규제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시장보다는 국내 시장에서 지배력을 가진 기업(예: 네이버, 카카오)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EU나 미국의 법/제도를 준용하다 보니 촉진 정책보다 규제가 앞서거나 자국 기업을 역차별 규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8장에서 소개한 것처럼, 에스토니아와 싱가포르는 정부 주도로 국가 차원의 공공 플랫폼 생태계를 만들어서 국내 산업/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생활에 편익을 제공하는 데 주력해 왔다. 에스토니아는 2000년대 초부터 전자정부 구축을 시작해서 데이터 공유 플랫폼인 X-Road를 정부 주도로 개발한 후 정부/민간의 약 900개 기관을 연결하고 공공서비스의 99%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X-Road는 2023년 기준, 핀란드, 아제르바이젠, 독일, 일본, 베트남, 브라질 등 20여 개 국가에서 약 52,000 사용자가 3천여 개 서비스를 통해 연간 27억 개 트랜잭션을 처리하는 글로벌 플랫폼 생태계(‘X-Tee’라고 함)로 발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80년대 말부터 전자정부 사업을 시작했고 1992년 IT2000 종합계획, 2006년 지능국가종합계획(iNation 2015)을 수립하였다. 2014년 11월에는 스마트 국가 전략(Smart Nation Initiative)을 수립하고 정부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전반을 디지털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 사업을 추진했다. 스마트 국가 전략은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할 것을 목표로 디지털 정부/경제/사회 건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부 주도로 개발한 CODEX 플랫폼은 데이터 아키텍처 표준과 지원 도구, 인프라-미들웨어-애플리케이션(즉, IaaS-PaaS-SaaS) 기술 스택 등을 포함한다. 앞에서 소개한 핀란드도 산학연 협력을 통한 국가 차원의 플랫폼 생태계 구축을 도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행정전산망을 구축하고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정부 구현을 목표로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면서 수준을 고도화해 왔다. 그 결과, 2022년 UN의 전자정부 평가에서 193개 회원국 중 덴마크와 핀란드에 이어 3위가 됨에 따라 2010년 이래 7회 연속 3위 이내에 기록된 국가가 되었다. 2022년에 처음으로 실시된 OECD 디지털 정부 평가에서는 33개국 중 종합 1위를, 2023년 OECD 공공데이터 평가 결과에서는 40개국 중 1위를 차지하였다. 실제 많은 국민이 국세청의 ‘홈택스’나 ‘정부24’, ‘고용24’ 등의 포탈을 통해 생활과 직결된 정부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제도 및 기술 측면의 도전과제를 안고 있다. 부처별로 구축한 약 17,000개 시스템이 (상호연결이 어려운) 사일로(silo) 상태이며, 데이터 개방/공유 실현에 이르는 장벽이 높고, 기술은 디지털이지만 절차는 아날로그이며, 많은 정부/공공 시스템이 클라우드가 아닌 시스템통합(SI)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 걸림돌인 것이다(정부만, 2023). 주문형/맞춤형 개발을 의미하는 SI 방식은, 클라우드 방식과 달리, 모듈화/표준화를 통한 연결, 통합이 어려운 모노리식(monolithic) 시스템을 만든다.
이와 같은 여건에서 윤석열 정부는 2022년 1월, 디지털플랫폼정부 구상을 발표하고 2025년까지 성숙 단계에 진입할 것을 목표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플랫폼정부(‘디플정’)는 ‘모든 데이터가 융합되는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국민·기업·정부가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에게 더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민과 기업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정부’를 가리킨다(디플정위, 2023). 디플정은 개념적으로는 종래의 전자정부 내지 디지털 정부를 GaaP로 확장함으로써 국민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창조하는 정부이다. 디플정은 ‘인공지능(AI) 데이터로 만드는 세계 최고의 플랫폼 정부’라는 비전/목표 달성을 위해 국민 중심, 하나의 정부, AI/데이터 기반, 민관 협력 등 4가지 기본원칙과 애자일 개발·운영·개선과 민관협업 조직, 사용자 중심 서비스, 공개·연계·개방, 안전/신뢰성 제공 등 5가지 업무원칙을 설정하고 있다. 2023년 4월에 공표된 ‘디플정 실현계획’은 오직 국민을 위한 정부, 똑똑한 원팀 정부, 민관이 함께하는 성장 플랫폼, 믿고 안심할 수 있는 플랫폼 정부라는 4대 전략과 ‘2023년 국민 체감으로 추진동력 확보, 2024년 기반구축으로 실행력 제고, 2025년 전면화로 성숙 단계 진입’이라는 연도별 목표하에 총 122개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플랫폼 기반 국가혁신생태계 구축 필요성과 접근방법, 선도국가 사례,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 현황 등을 살펴보았다. 이제 ‘지금의 디플정을 넘어서는 디지털 국가를 건설한다면 어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여기에서 ‘디지털 국가’는 디플정의 대상인 정부/공공 업무와 서비스를 넘어 민간 영역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국민생활을 지원하면서 지속적 혁신을 실현하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가 디지털 국가 건설을 도모하는 것은 독일/EU처럼 경쟁력 있는 플랫폼과 플랫폼 기업을 육성해서 글로벌 기업의 국내 시장/산업 공략에 대응하는 수비 전략이면서 에스토니아처럼 민관이 함께 플랫폼과 서비스를 개발, 수출하는 공격 전략이 될 수 있다.
디지털 정부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에스토니아, 싱가포르는 물론, 미국, 영국 등에 못지않게 우수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UN, IMD, OECD 등의 평가 기준으로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국가라는 더 큰 목표를 놓고 보면, 기존 시스템에 내재된 기술/관리 측면의 약점이 계속해서 크나큰 장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기술 측면에서는 플랫폼이 리거시 시스템을 통합하고 기존 서비스나 새로운 서비스를 연결할 때 효율성(예: 시간/비용)과 효과성(예: 상호운용성)을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 관리 측면에서는 정부/공공과 민간 부문이 가진 기술/경험, 인력/예산 등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집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 해결해야 문제의 범위와 깊이가 훨씬 더 크기에 정부가 가진 역량만으로는 곧 한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문제점을 해소 또는 완화하고 디지털 국가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4가지 점에서 새로운 전략과 실행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① 비전/목표: 행정, 경제, 사회, 문화 등 국민생활 전반을 지원하고 국가 혁신 인프라가 될 디지털 국가 건설을 목표로 3~5년의 단기 목표/계획과 10년 정도를 내다보는 장기 목표/계획을 수립함, ② 플랫폼: 다양한 데이터 공유와 애플리케이션/서비스 연동이 가능한 핵심구성품을 우선 개발, 적용하고 지속적으로 개선, 보강함, ③ 자원 확보: 디지털 시스템 자체를 구축,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 인재, 시설, 자금 등을 안정적으로 확보함, ④ 거버넌스: 정부-민간 협업을 위한 리더십, 조직, 절차/제도 등을 수립함.
O 비전/목표, 전략 수립
디지털 국가 비전은 (8장에서 정의한 것처럼) ‘일반국민, 기업, 정부, 대학/연구기관 등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일상생활과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모든 국민의 삶의 질과 경제/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미래 국가’로 설정한다. 디지털 국가는 궁극적으로 행정 합리화(예: 데이터 기반 행정)와 국내 산업 보호(예: AI와 클라우드 관련 공급/수요 산업), 신산업 육성(예: 모빌리티, 헬스케어 등 융합산업), 국민생활 편익 향상(예: 기업/국민을 위한 원스톱 서비스) 등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장기 계획은 기술적 난이도나 정책적 긴요도 측면에서 우선순위가 낮은 과제와 법/제도 및 조직 문화/역량 개선, 조직별 임무/기능과 사업/예산 조정 같은 과제들을 포함한다. 단기 계획은 디지털 국가 비전을 뒷받침할 핵심 과제를 포함하되 조직, 인력, 예산, 기술 등 확보 가능한 자원/역량의 제약을 감안한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와 ‘패스트 팔로우어’(Fast Follower) 전략은 대상이나 여건(TPO: Time, Place, Occasion)에 따라 선택할 대안이지 모든 문제에 똑같이 적용할 황금률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활용하거나 소비자의 기대/욕구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상품을 개발할 때는 희생양이 될 위험을 고려해서 2등을 택하는 것이 낫다. 반면, 수요가 명확한 전문기술이나 틈새시장용 상품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1등을 노려야 한다.
O 플랫폼 구축: 역할, 기능, 아키텍처, 요건, 조직/제도 지원
디지털 국가 플랫폼 (계층)은 정부/공공, 기업, 대학/연구소, 일반국민 등이 생성-관리-활용하는 다양한 데이터를 공유하고 관련 프로세스를 연결, 통합하는 중추 역할을 담당한다. 데이터는 예를 들면, 정부/공공기관의 정책 수립 및 집행 자료, 기업이 보유한 기술/상품, 사업, 시장/고객 관련 데이터, 대학/연구기관의 교육/R&D 관련 자료 등이 교환/공유 대상이 된다. 프로세스는 예를 들면, 정부의 정책 기획-집행-평가, 기업의 제품 기획-설계-생산-유통, 연구기관의 데이터 수집-분석-실험 등이 대상이 된다. 이들 데이터/프로세스는 형식(예: 문서, 숫자, 신호)이나 발생/수집 주기(예: 실시간, 일 단위), 처리 방식(예: 실시간 처리, 뱃치처리) 등이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플랫폼은 특정 기술이나 상품, 조직 등에 편향되지 않은 개방적 아키텍처로 구현되어야 하며, 높은 수준의 기능/성능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관리체제(예: 조직, 전문인력, 법/제도)도 마련되어야 한다.
디지털 국가의 품질은 인프라의 수준(예: 서버 용량, 통신망 속도), 그 위에서 작동할 플랫폼의 수준(예: 안전성, 안정성), 그리고 애플리케이션/서비스의 수준(예: 참신성, 편의성) 등에 좌우된다.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상호연결성(interconnectivity)은 제공하지만,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은 고수준의 기술/관리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보장할 수 있다. 상호연결성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수준이지만, 상호운용성은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참여자들이 일정 기간, 큰 어려움 없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 디지털 정부의 확장성과 안정성은 X-Road 플랫폼의 우수성에 힘입은 것인데 이는 20여 년 동안 일관된 정책을 추진해 온 관료들과 전담 기술조직인 RIA의 역량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싱가포르도 스마트 국가 정책/전략을 주관하는 위원회(SNDGG) 외에 많은 기술/관리 인력을 가진 기술청(GovTech)을 운영하고 있다(김명희, 2020). 우리나라 경우, 고수준의 시스템 아키텍처를 다룰 수 있는 지식과 실무 경험을 가진 국내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은 상태이다. 정부와 민간에서 대규모 디지털 시스템 구축 경험을 가진 기술자들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O 자원 확보: 기술, 인력, 설비, 예산 & 투자
디지털 국가는 10년 이상의 장기 목표하에서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할 대규모 사업이며 정부 혁신을 넘어서 경제/사회 혁신과 맞물려야 할 사업이기에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자원과 기량을 모아야 한다. 행정 효율화를 넘어서 경제적/사회적 가치(예: GovTech 선도기업의 해외 진출, 지역 혁신)를 달성하려면, 기업과 개인이 가진 기술, 자금, 인재, 컴퓨팅 자원 등을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공공의 관련 사업/예산을 결집하고 민간 부문의 영리/비영리 목적 사업을 통합해서 투자/노력의 중복과 낭비를 배제하는 것도 필요하다. 공통 기능/서비스를 플랫폼으로 구축해서 공유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 효과적인 방안인 것이다.
민간 참여 확대 방안으로 정부와 민간(특히, 국내 플랫폼 기업)이 함께 시스템을 개발-운영하고 수익을 나누는 공동사업(PPP: Public-Private Partnership) 방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① 개방적/중립적 아키텍처를 설계-구현하는 식의 기술적 장치와 ② 정부-민간 공동사업의 착수-계획-실행-성과배분에 대한 지침 및 기준, 기술의 공동 활용 및 보호, 인력 교류, 설비 공동활용 기준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2000년대 이전에는 정부가 R&D를 포함한 국가 혁신생태계를 주도했지만, 이제는 민간의 참여-기여에 따라 국가 경쟁력이 달라지는 시대이다. 생성형 AI와 대규모언어모델(LLM), 슈퍼컴퓨팅, 양자컴퓨터 등 신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상업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첨단 기술과 제품/서비스를 기반으로 시장지배력을 확보한 소수의 글로벌 기업이 세상을 바꾸고 있음을 감안하여야 한다.
O 거버넌스 설계-운영
아키텍처가 구성요소들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기 위한 시스템 설계-구현 기술이라면 거버넌스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모으도록 하는 관리 기술이다. 거버넌스는 구체적으로 리더십, 조직구조, 절차 등을 포함하며 의사결정 방식에 따라 수직적, 수평적, 임의적, 협업적 거버넌스 등으로 나눌 수 있다(본서 5장 참조). 디지털 국가 사업의 정부/공공쪽 거버넌스는 보다 강력한 리더십과 제도로 부처별, 기관별로 각개약진하는 식의 사업/시스템을 조정, 통제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이는 ‘컨트롤 타워’로 불리는 수직적 거버넌스보다는 오히려 상이한 관점과 접근방식을 토론과 협의를 통해 조정하는 수평적 거버넌스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변동성이 큰 문제일수록 다양한 지식/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을 모은 횡적 연결(Cross-functional) 조직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정부-민간 공동 사업 부분은 오히려 민간 부문이 앞에 서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식의 협업적 거버넌스를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조정자/지원자 역할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정부는 장기 목표 설정, 예산 확보, 추진체제 구축, 법/제도 개선, 기반기술에 대한 R&D 지원, 교육훈련 지원, 기술/업무 표준화, 국내/외 협업 네트워크 구축 지원 등을, 민간은 기술/인력/자금 투자, 공공/민간 플랫폼 및 서비스 개발 사업 수행, 국내/외 시장 개척 등을 담당하는 식으로 책임과 역할(R&R)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WEF(2019)는 정부가 플랫폼 기업을 파트너로 삼아 자신이 담당해야 하는 촉진자/규제자 역할과 공공 플랫폼 구축-운영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는 에스토니아와 싱가포르에서도 입증된 성공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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