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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Jul 11. 2023

문명은 올곧이 파괴만을..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인체에 대해서도 정감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질적으로 주장하는 듯하다. 반면에 렘브란트의 해부에 관한 그림에서 화가는 반쯤 벌려진 입과 머리 쪽에 그림자를 드리워 시체에서 소명된 육체를 알아차린다. 더군다나 이상하게 그려진 왼손은(실제로는 오른손을 그려 넣음) 작정한 것이 틀림이 없는데 폭력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그림 전체는 사자에 대한 예의가 그득하다. 토마스 브라운이 죽음에 관하여 그토록 많은 기록을 남긴 것도 모두 사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다. 인체는 기계가 아님을 몸소 보여줌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서문을 대신한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이성을 핑계로 인간의 감성과 감정을 무시함으로 죽음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무심한 기계였나보다.


죽음은 모든 생물이 반드시 걸리는 병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청어가 한결같이 죽어있는 것은 그물 안에서의 삶을 위한 사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무생물에게도 숙명이다. 시간이 지나서 쇠락한 저택 또한 죽음의 여부는 그 옛날에 비해 무엇을 지금 품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파괴와 함께 주위 식물도 어질러진다. 잔해로 남아있는 도시도 또한 죽음이다. 오래전에 사라진 도시인 던위치는 도시가 완벽한 죽음에 이르렀던 전형이다. 자체가 아예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쟁 또는 착취로 인한 개죽음은 가장 파괴적인데 고질적이고 비가역적이어서 언제나 온갖 것들로 범람한다. 1차 대전의 사진들로부터 전쟁의 광기가 하찮게 느껴지며, 공중전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죽어간 자들, 벨기에가 벌인 콩고 대 학살극에서의 레오폴드, 케이스먼트 그리고 콘래드의 어둠과 빛, 워털루에서의 반나절 동안의 수만 시체 만들기로 작가는 치밀하게 집단과 개체의 죽음을 오가며 산 자들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태평천국의 난, 종국에는 수십만 명의 자살자들이 있었다거나 서태후 치하에 중국 남부는 거의 천만여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사실로 작가는 무엇을 얘기하려고 한 것일까? 이렇듯 죽음은 무릇 인간에게는 치명적일지라도 너무나 가벼워서 휘날릴 지경이다.


제발트의 기술은 구속적이지 않다. 인간의 야만성을 통한 거친 파괴를 기술만 하고 구속사적이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역사의 진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진보는 발전을 함의하므로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는 인간의 군상을 그리는 작가에게 역사란 그저 야만인의 기록일 뿐이다. 그는 오직 파괴만을 전편을 통하여 발설함으로 무엇인가를 재구성하려 하는 듯싶다. 그는 인간 문명은 분명히 퇴보한다고 믿고 있다. 그가 언급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역사에 나오는 사람들로서 인간 본성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케이스멘트, 콘래드(로드 짐의 작가), 피츠제럴드 등인데 물론 그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존재했고 죽었을 뿐이다.


문단은 아예 끝나지 않는 듯싶다가도 일단 끝은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9쪽이 모두 한 문단으로 빼곡히 구성되어 최소한 한 쪽을 차지하는 문장들은 세워놓은 직사각형의 모양이어서 어지간해서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마 희생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기술의 장치라면 생각이 너무 나간 것일까? 대화도 표 없이 처리될 만큼 굳은 모양새인데 소설로는 드물게 가끔씩 사진이 껴 들어와 행렬이 흐트러질 때도 있다. 그럴지라도 사진들은 문장과 한 몸이 되어 긴장의 경향성을 더해 줄 뿐이다. 그래도 무엇보다도 이 모양을 굳건히 지켜주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물건의 나열이다. 여러 곳을 다니며 그곳과 관련된 또는 그곳에서 생각이 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을 초월하여 한 장소에서 풀어놓는데 가히 백과 사전식으로 방대한 양이다. 나열에 집중하다 그가 정작 하려고 말한 것을 놓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오직 파괴만을 말할 뿐 그것의 치유를 얘기하지 않는 일관성은 절대로 놓쳐지지 않는다. 물론 읽는 자가 에피스테메를 향한 자세가 있으면 말이다. 그는 문명의 비관론자이고 그런 필연성에 인류는 살아갈 뿐이라고 항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토마스 브라운의 박물지 얘기였다면 끝도 그 박물지의 누에 얘기이다. 물론 소설의 거의 중앙에 서태후 얘기 때 누에 얘기가 잠깐 나온다. 제발트는 누에가 변태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하는 것처럼 오직 파괴적이기만 한 인간이 환생하여 변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소설 <토성의 고리>는 우울함의 주변을 돌므로 우울함의 필연에 영원히 끌려다니는 모든 개체를 상징적으로 얘기하는 것일 듯싶다. 토성이 우울을 상징하며 고리가 파괴로부터 생성된 아이러니 모두는 제발트의 치밀한 선택이었다.

정말 뛰어난 독보적 작가...


독사doxa는 저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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