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 세계의 모사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실 세계가 그저 모사일 뿐이라면 우리의 감각은 진리가 아닌 모방체를 접할 뿐이다. 더군다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원본은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이성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지만 이데아 세계는 불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불완전한가? 과연 우리의 감각으로 아는 현실 세계가 의미가 있을까? 현실은 모방일 뿐이므로 우리 세상의 진리를 알려고 하는 일은 무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세상 지식이 의미가 있어야 파헤칠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자연의 진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이데아 개념을 수정하지 않고는 무의미할 뿐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플라톤은 깊은 생각과 감각을 엄밀히 구분하였다. 세상의 변화는 감각으로 우리가 느끼는 것으로 참된 앎이 아니고 오직 참된 불변의 이데아에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를 두었다. 우리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나, 이는 감각으로 아는 것일 뿐 믿을만한 대상은 아니다. 이와 비교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만물이 변한다는 것을 전제로 변화 자체에 존재의 정체성과 가치를 두었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상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는 따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 안에 항상 존재하여 변화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실체이다. 이와 같은 동적인 관점은 정적인 관점에 선 플라톤과 대비된다. 이런 연유를 살펴보자.
세상의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우리가 세상에 관한 분석 가능한 확고한 과학적 진리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각의 세계는 우리 세계와는 다른 이상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나 그림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데아는 사물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의 세계는 참된 실재이다.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를 설명하게 하는 기본적인 원리나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의 대상이 되므로 우리는 이성적 추론에 덧붙여 감각을 이용하여 세상을 연구할 수 있다.
이데아가 사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사물을 어떤 재료에 그것을 특징짓는 형상적 성질이 넣어지거나 갖추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나무로 된 의자의 재료는 나무이고 의자의 생김새는 형상이다. 이 얘기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재료가 다르고, 다리 개수가 달라도 의자를 다른 사물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개개의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대상을 특징짓는 어떤 것들을 파악하고 그것이 속하는 종류를 알아내어 내적 구조를 분석한 결과이다. 즉 귀납적 분석으로 대상들 가운데 이들을 공통으로 특징짓는 어떤 것을 밝혀낸 것이다. 특정 대상 자체의 본질을 파악하여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할 수 있다. 의자는 의자의 형상이 존재하므로 의자의 다리 개수, 재질, 색, 생김새 등이 달라도 의자로 판단한다. 어릴 적의 영희가 성인이 된 후의 영희와 다를지라도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보고 영희라는 걸 구별해 낸다.
이데아 개념은 사물의 형상이 사물과는 따로 존재하고, 동시에 형상이 특정의 사물 안으로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스며들어 사물이 정체성을 가졌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항상 사물 안에 존재하게 함으로 신비함이라는 비 철학적 요소가 없다. 사물을 구성하는 재료는 내재하여 있는 형상과 결합하여 개별 사물이 되므로 형상은 개별 사물의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사물을 알 수 있지만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은 변한다. 변화는 이미 헤라클레이토스 등에 의해서 대립하는 둘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또는 밝음과 어둠 등 양극적 대립이 대표적 예이다. 변화란 차가운 것이 뜨겁게 되거나 아침이 밤이 되는 것처럼 양극이 바뀌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변화는 대립하는 성질이 서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차가움이 뜨거움으로 변한 게 아니라 차가웠던 어떤 게 뜨거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대립하는 것은 하나의 속성일 뿐으로 사물과 구별된다. 일단 실체와 속성이 확실히 구분되면 사물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사물은 변한다. 태아가 아기가 되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도 하고, 물체가 운동하여 공간의 위치가 바뀌기도 하고, 나무 재료가 탁자가 되기도 한다. 존재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면 존재론은 무용지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실제 세계에 있는 구체적인 원리로 생각하는 개념을 확장하여 변화를 설명하려 한다. 형상은 개개 사물의 운동, 변화 또는 발전을 통제한다. 즉, 형상은 변화 또한 설명하는 원동력의 역할도 수행한다. 비존재는 무조건 없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변화를 설명하려 한다. 현재(또는 미래)의 사물이 어떤 것이지만 과거(또는 현재)에는 잠재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것이지만 미래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있으므로, 잠재성은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절대로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는 잠재적인 존재로부터 생성되지, 존재로부터 생성되지 않는다. 이처럼 내재적 이데아인 형상은 변화 또는 운동을 설명하게 할 길을 열고 있다. 존재는 변화를 염두에 두고 얘기해야 한다. 그게 우리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