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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희 Mar 20. 2021

자연과학과 타 학문의 분리

자연과학의 필수적 요소

유럽 사회에서 고대가 근대에 끼친 영향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이해되고 있다. 첫째로, 고대는 근대 문화의 다양성과 흐름 및 고유성을 위한 토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근대가 고대의 여러 분야를 수용하는 데 그 방식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고대가 근대에 끼친 영향은 논리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 기하학 등 말고도 시, 음악, 건축, 역사 서술의 정초로서 고대 그리스가 고대의 전형이라는 것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 몇 분야를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돌아간다. 더군다나 근대의 고대에의 의존도는 더욱더 많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강한 존재는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고대를 보는 눈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하다. 이는 마치 근대의 사람들이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비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어떤 면에서 고대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고 과거에 대한 근대의 우월의식은 급진적이라 할 만큼 깊고 오래되었다. 이처럼 고대 사상의 정체성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이 있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고대를 비하하는 개념의 준거는 자연과학 이론의 많은 부분이 틀렸다는 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자연과학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이다. 16세기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철학을 논리학에 완전히 종속시켜 거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한다. 그러나 고대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되어 온 이러한 비판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논쟁적일 수 있다. 폐기되어야 했던 고대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단지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를 들이대어 비판적 견해를 밝히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에 대한 비판적 및 무시적 태도는 17세기의 데카르트의 사유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는 고대라는 지난 과거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전혀 다른 시대로 여겨졌고 사실 그러했다. 이런 연유로 고대는 그저 역사적으로만 이해하려 했고, 모든 분야를 고대의 잣대에 의해 판단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가 발명한 좌표계는 경험적 측정 자료를 마련하게 하여 올바른 감각 사용자에게 법칙과 항상성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다. 자연은 자동으로 운행하는 특정의 규칙 세계였고 실험을 통한 재생산이 가능한 자연은 기계와 같았다. 더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고대를 논하는데 분명한 것이 있다. 고대 과학 체계는 사유 자체로부터 자명하고 사유 자체에 의해 강요된 인식 기준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그에 비해 데카르트의 주장은 이와 같은 비판적 반성은 없다. 그의 주장은 사유가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확실하게 나타났는가의 방식일 뿐이고, 확실성을 담보로 하는데 필요한 증명 기준은 되지 못한다. 그가 그토록 주장한 이성의 작용에 의한 여러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은 모두 틀린 것을 보더라도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철학의 원리>에 나오는 수많은 물리적, 생물학적 설명은 모두 틀렸다.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감각적 활동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유는 어떤 것을 규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고대 과학이 사물의 본성을 따지지만, 뉴턴 혁명으로 야기된 근대 과학은 사물을 경험적 결과로 인식한다. 고대 과학에서는 일단 본성이 알려지면 자연 탐구에 대한 의식의 자기 활동이 제한되어 더 이상의 연구가 필요 없게 될 수밖에 없다. 고대 과학의 근간인 통일성이 빠르게 해체되기에 이른다. 뉴턴의 과학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해체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몰아갔다.


근대 초기의 이와 같은 지적 발전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오류를 바로잡는 의미에서 고대에 대한 우월감을 일으키게 했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이성을 자기 확실성 안에서 사유와 과학의 원칙과 기준으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으로 고대의 개념 극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는 반성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뉴턴의 과학혁명이 우월감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게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우월할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정당성의 측면에서 고대, 근대와 현대는 각각의 가치로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뉴턴 역학이 원자 이하의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올바르지 않다고 비난하지 않듯이 설령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올바르지 않다고 해서 비난받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그 시대에 성취할 수 있는 감각의 고유한 인식 능력에 관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뉴턴도 그 시대에 성취할 수 있는 감각의 고유한 인식 능력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비판적 성찰의 측면은 같으나 자연을 보는 도구는 변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은 그런 관점에서 동등한 위대한 과학자이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를 혼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로 자연의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하여 관찰 등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동물학의 집대성은 관찰과 실험 없이는 불가능한 결과였고 직접 감각적 행위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에는 존재하는 데이터를 이용하여 논증적 추론을 거쳤다. 이러한 추론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물리학에서 많다. 당시에 검증할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의 중요성을 <분석론 후서>에서 분명히 밝혔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체계를 신학에 접목하고 이를 교회가 받아들이므로 그의 자연과학은 진리가 되었다. 스콜라 학자들은 그의 자연과학을 으뜸 원리로 삼아 연역을 동원하여 자연을 탐구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는 수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만약 고대 자연과학이 틀렸다는 이유로 근대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면 그 이유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래도 비난하고 싶으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를 공격하라.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지적할 것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문제는 자연과학에서 일어났음에도 이러한 결과는 바로 자연과학과 여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과의 결별을 예고하기에 충분하였다. 자연과학과 다른 학문은 이제 방법론에서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뉴턴물리학의 보편성과 필연성은 실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맺어진 결실이다. 반면에 윤리학이나 정치학 등 다른 학문에는 그러한 규정이 여전히 적용될 필요가 없다. 더욱이 물리학의 경우 실험에 못지않게 수학이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우리는 방정식을 풀어 자연 현상을 올바르게 예측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서는 볼 수없던 일이다. 이러한 차별은 더 이상 모든 학문을 통합적 법칙 아래 묶어 설명되어야 하는데 의문을 던져준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뉴턴물리학을 예를 들면, 실험 등의 결과로부터 보편적인 법칙을 끌어내어 자연 현상을 정확히 맞추는 반면에, 타 학문은 논증에 수학적 체계나 과학적 체계를 사용하더라도 여전히 다중의 결과를 내놓기 때문이다. 논증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 보상받고 싶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자연과학과 타 과학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차이는 곧 통일 법칙의 정당성 여부로 이어지므로 모든 학문의 통일적 기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근대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스 사상가들이 애초부터 생각해 온 환원주의는 이제 자연과학에서만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뉴턴물리학은 환원주의를 사변적인 것에서 실제적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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